초등학교 4학년인 첫째 아이와 글쓰기를 함께하고 있다. 매일 주제를 번갈아 가며 한 편씩 쓴다. 강제성은 없다. 다만 저녁 시간, 자신과 노는 것보다 모니터 앞에서 끙끙대며 글을 쓰는 나를 보며 아이는 궁금했을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기에 저럴까’하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했으려나.
“엄마, 나도 글쓰기 하고 싶어요. 같이 하면 안 돼요?”
우리의 게임, 아니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이의 글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와 놀랐다. 여전히 맞춤법이 틀리고 앞뒤가 안 맞는 어색한 문장들에 웃음이 절로 났다. 온갖 접속사는 기본이고, 주어는 ‘나는’에서 ‘너는’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갔다. 어떤 일의 순서가 뒤죽박죽 되어 글이 마치 타임머신을 방불케 했으며, 장소도 여기로 저기로 바뀌는 바람에 읽는 나를 홍길동으로 만들기도 했다. 무조건 길게 적으면 잘 적은 글이라고 생각하는 꼬맹이의 당찬 생각 덕분에 글은 흡사 래퍼의 랩 같기도 했다. 랩처럼 읽지 않으면 면발 뚝뚝 끊기는 것과 같은 글이랄까. 나는 앞뒤로 리듬을 타며 읽어내야 하기도 했다.
“엄마! 내가 이렇게나 길게 잘 쓸 수 있을지는 상상도 못 했어!” 아이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해맑지' 그 말을 나 역시 상상도 못 했다. 자신감에 넘치는 아이는 본인이 쓴 글이 가장 완벽하고 멋지다고 믿었다. 나는 일부러 교정을 봐주지 않았다. 글쓰기의 규칙을 가르치기보다, 아이가 자신의 글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하고 싶었다. 저 반응을 봐서는 성공인 것 같다. 우리는 동등하게 각자 한편씩 쓰고, 서로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가 되어주기로 했다. 더 잘 쓰고 싶다는 생각에 처음 규칙으로 정해놓은 20분 글쓰기는 자연스럽게 30분이 되고, 1시간이 되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늘어난 시간만큼 아이의 글은 가지런해지고 문장 하나하나에 더 많은 생각이 담겼다. 어느새 진지하고 꽤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쓰던 아이도 자신의 글에 애정을 가지기 시작했다.
"엄마, 이 부분은 좀 이상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엄마도 엄마글이 멋지다고 생각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글을 쓰는 순간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더 멋진 글을 쓰고 싶어질 거야."
나 역시 그랬다.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쓰던 당시, 한 시간을 고민해서 겨우 써낸 그 글이 제법 잘 적은 글 같아 우쭐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 글을 읽었을 때, 너무나 미숙하고 어색한 글이라 조금 부끄러웠다.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쳐 봤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다른 사람의 '잘 쓴' 글들을 찾아서 읽어도 봤지만, 그럴수록 내 글만 더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나도 저들처럼 멋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문장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아무리 따라 쓰려해도, 그들의 글처럼 되지 않았다. 남의 문장을 흉내 내는 동안 정작 내 글은, 내 생각은, 내 색깔은 점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완벽히 잘 쓰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남의 문장을 부러워할수록 내 글은 멀어졌고, 내 목소리를 잃어갔다. 그러하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그 질문이야말로 내가 진짜 마주해야 할 것이었다.
완벽함은 곧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예민한 마음이 나를 방해하고 괴롭히기도 한다. 지적인 것, 아름다운 것, 남들에게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것, 명확한 것, 겉으로 반듯해 보이는 것을 좇았다. 욕망은 결핍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던가. ‘온전한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다르면 내가 그렇게 초라하고 궁핍해 보일 수가 없었다. 온전한 것을 좇아가면서도, 정작 어떠한 것도 ‘완벽한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나는 완벽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초라함을 자각해도, 그 초라함으로 들여다보는 그 순간조차도 내 삶의 일부다. 모든 것 다 해낼 수 없다. 그 모자람조차도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중요한 건, ‘나는 부족한 채로도 온전한 나일 수 있을까’였다. 글을 쓰면서 이미 나는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초라하기에 더 많은 질문을 하는 것일지도. 그리고 그 질문들이 쌓여, 나만의 문장이 되어갈지도.
완벽함과 불완전함, 주객이 전도된다.
조금 어리숙하고 못생긴 것, 부끄러운 것, 모호한 것, 겉으로 보기에 빈틈투성이인 것, 초라한 것들을 속절없이 받아들인다. 오타 투성이의 초고, 아이가 나에게 보여준 그 모든 불완전함과 비슷하게 생긴 것들 받아들인다. 온전한 나의 것.
예민함을 버리지 않으며, 잘 해내고 싶다는 욕망을 한 손에 쥐고, 다른 한 손엔 결핍이라는 욕망을 쥐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나아가야 할 길목 앞에 선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부족해도 좋다. 중요한 건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 길의 문을 두드린다. '나다운 나'를 마주하는 문.
자, 게임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