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써봐
<기획자의 사전>에서 정은우 작가는 이종 異種의 것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낼 때 두 가지 장점이 있다고 했다. 뻔한 정답과 결론을 내지 않는 집요함을 길러주며, 진짜 문제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통찰력을 갖추게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혼자 놀이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그 당시 우리는 종이컵 몇 개를 가지고 놀곤 했다. 어느 육아서에서 종이컵 쌓기가 집중력과 지구력을 키워주는 데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놀이의 또 다른 면을 깨닫게 된 것은 그다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쌓은 종이컵을 온몸을 이용해 한방에 무너뜨릴 때의 짜릿한 쾌감과 스트레스 해소를 느끼는 동시에, 사방팔방으로 뿌려진 종이컵을 보며 ‘저걸 언제 다 치울지’라는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는 육아템이라는 걸 알았다.
네 살 아이의 종이컵 쌓기는 그야말로 인내였다. 몇 번을 쌓다가 쉽게 무너지는 것에 아이는 금세 싫증을 내어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종이컵을 차곡차곡 쌓아 길게 늘여놓기 시작했다. “치치포포, 엄마, 기따! 치치야 치치.” 그렇게 완성된 것은 기차였다. 기차는 곧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되고, 다시 스르르 온 거실을 누비는 뱀이 되었다.
아이의 놀이를 지켜보며 깨달았다. 어른들이 정해놓은 방식이 전부가 아니며, 때로는 실패 속에 창의적인 ‘무엇’이 탄생한다는 것을. 이질적인 것들의 만남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처럼. 아이의 즉흥적인 놀이 또한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글쓰기로 고민하는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뭐 하나 뚜렷하게 잘하는 게 있을까?'
'그래도 먹고사는 일이 있으니 그것을 좀 써볼까''
'아니야, 너무 속물스럽고 가식적인 것 같아.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건 어쩐지 재미가 없더라. 글이 재미가 없어.'
'글을 잘 쓰면 되지.'
'잘 쓴 글이 뭔데. 읽히는 글이겠지?'
'반경을 넓혀봐. 진솔하게, 재미있게, 도움이 되는 글을 쓸 수도 있지.'
'잡스럽다고 생각한 나의 모든 것들이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을까?'
'그럼! 하늘을 쓴다고 생각해봐. 날지 못하는 것들도 니 글 속에서는 이미 날고 있을 수도.'
'일단 써보자!'
'얼기설기 엮여있던 내 안의 고민들이 나만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될 때까지.'
내 안의 이종들, 상호 공존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호환시킬 수 있을지 매일 글을 쓰면서 알아가야겠다. 쓸데없는 공상이라 여겼던 것들, 먹고사는데 하등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던 나의 잡스러운 철학적 사유들, 피곤하리만큼 날 선 감정들을 겉으로 보기에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에 어떻게 호환시키고 녹여낼 수 있을지를 매일 쓰면서 고민해 본다.
기꺼이 잡스러워질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