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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밀도

by 노미화
내 편에서의 진실과 그녀 편에서의 진실이 다를 때, 그것은 어떻게 전해져야 아무도 해치지 않을 수 있을까. (...) 그런 생각들을 한참 골라보다가, 나는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그저 그녀와 같은 자세로 나란히 앉아 있기로 했다. 곁에 어두운 우물 같은 이불 한 채를 두고.
나에게는 낮이고 그녀에게는 밤인 시간이었다.
한정원, <시와 산책>, 35쪽


침묵에도 밀도가 있다. 흐르듯 지나가는 침묵도 있지만, 눅진하게 가라앉아버리는 침묵도 있다. 차가운 물이 천천히 방 안을 채우는 것처럼, 말도 감정도 숨어버린 그 시간은 천천히 관계의 온기를 앗아간다.


어떤 침묵은, 다정하지 않다.


화를 삼키고, 오해를 눌러 담으며, 끝내 말로 닿을 수 없다는 절망 앞에서 입을 닫는 침묵은 무섭기까지 하다. 차가운 공기처럼 방 안에 떠돌다가, 언젠가 문득 폭발하는 것처럼 터져버리는 침묵. 그런 침묵의 파괴력을 상상해 본다.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지친 마음, 오랜 시간 쌓인 오해나 무력감이 만들어낸 고요한 절망. 말을 하지 않아서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무너져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화를 삼키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 언성을 높이지 않기 위해 혹은 버텨왔던 감정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은 말들. 그러나 그렇게 삼켜진 말들은 때로 마음속에서 부식되어, 관계의 밑바닥을 먼저 허물어뜨린다. 그건 말보다 더 깊게 스며드는 상처다.


침묵은 늘 같은 표정을 짓지 않는다. 아무도 해지지 않기 위한 침묵이 오히려 관계를 망쳐버리기도 한다. 고요함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있는 수많은 마음의 조각들. 말보다 더 선명한 침묵의 파편들. 그 파편들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주한 침묵은 어쩌면 가장 차가운 얼굴일지도 모른다. 아무 말 없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랑과 포기 혹은 그 중간쯤에서 머뭇거리다가 체념이라는 우물을 판다. 그리곤 어느 순간, 감정의 이기심이 '다정한 침묵'을 질투하기에 이른다.


'괜찮아'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말보다 더 오래 머무는 그 '다정한 침묵'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무언가를 이해시키거나 해명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만 흐를 수 있는 그 다정하고 잔잔한 침묵을 질투하다 그만, 슬퍼진다. '어떤 침묵은 다정하지 않다'라는 문장의 주어가 슬그머니 바뀐다.


'내가 다정하지 않구나.'


침묵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도 모른다. 침묵을 선택했지만, 감정을 감출 수도 없고, 진심을 덮을 수도 없다. 묻어둔 말과 감정은 언젠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이해받지 못한 마음은 결국 외로움으로 남는다. 성숙이 아니라 도피였고, 배려가 아니라 회피였다. 침묵이 사랑이든 체념이든, 혹은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감정이든, 결국 나는 그 안에서 나와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밖에 없다.


말은 어긋날 수 있지만, 침묵은 비어 있는 공간 속에 오해를 초대한다. 상처와 위로, 오해와 신뢰, 체념과 기다림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이 낯선 언어를, 나는 조금 더 배워보기로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 시인의 글처럼, '그저 누군가와 같은 자세로 나란히 앉아, 곁에 어두운 우물 같은 이불 한 채를 두고. 나에게는 낮이고 누군가에게는 밤인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 보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침묵의 밀도는 우리가 감당한 마음의 무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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