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한쪽 구석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는 장면을 상상할 때 어떤 애잔함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다. (...)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60쪽
'더는 태울 게 없어서 스스로 꺼진 불'이라 해야 하나. 지푸라기 몇 개 모아놓고 일단 불을 지피면 일순간 화르륵 불이 붙다가, 금세 따딱거리며 꺼져가는 불씨. 그 꺼져가는 불씨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사람 이야기가 아닌 게 없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너무나 얄미워진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이리도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불을 지피는데, 지푸라기만 냅다 던져놓고 있으니. 쌓아둔 장작이 씨가 말랐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된 무기력. 나만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쓰면 된다는 공식과도 같은 쉬운 말. 그럴듯한 자기 위안 조차도 지푸라기처럼 말라붙어 간다. 무언가를 쓰려 앉았다가 한참을 바라만 보다, 다시 덮어버리는 일. 한 문장을 겨우 적어 내려가다 다시 지워버리는 일. 아무거나 쓰고 싶지만, 아무렇게나 쓰고 싶지 않은 마음. 생각은 뱅뱅 도는데, 마음은 먼저 식어버리는 일. 실은 그 모든 것이 견디는 일이려나.
소설가가 말하는 애잔함이란 어떤 것일까.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 자신의 이야기임에도, 그것을 끝내 꺼내지 못해, 혹은 끝내 완성하지 못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계속 미끄러지고 마는 감정이려나. 이야기의 가장자리를 맴돌며 끝내 중심에 닿지 못하는 마음이려나. 그 애잔함의 무게를, 내가 알 수 있을까. 안다고 하면 교만한 마음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이라도 남기는 걸 보면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지진 않았나 보다. 아주 희미하지만, 아직 뜨거운가 보다. 장작이 없다고 해서 끝은 아닐지도. 언젠가 바람이 불어와, 아주 사소한 풀잎 하나로 다시 타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말도 그 풀잎 중 하나일지도. 이토록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말들이, 그래도 내 안의 불씨를 어루만지고 있다는 사실.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일. 정말 신기하리만치 이상한 일이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단 하나의 문장이 마음을 붙잡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빈 페이지 앞에 앉는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불)완전연소의 한 가운데. 다 타버렸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서 그을음조차 문장이 되어 나를 살리길 바라며.
지금처럼.
불씨가 남아 있어서,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 2> 두번째 연재 시작합니다.
[연재 브런치북] 아무거나 써도 괜찮아 2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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