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서른 살 너머까지 살아 있을 줄 알았더라면 스무 살 그즈음에 삶을 대하는 태도는 뭔가 달랐을 것이다. (...) 그 공허함이란 결국 새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피해 들어가는 자폐의 세계였던 것이다. 번데기가 허물을 벗듯이, 새가 알을 깨듯이 우리는 자폐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세계 속으로 입문한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결국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125쪽
니들이 뭘 알겠니.
요즘 들어 눈빛이 달라진 초등 고학년 남학생이 있다. 말투와 행동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졌다. 갑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도 된 것처럼, 예민함과 무심함을 동시에 품은 묘한 태도. '그분이 왔구나' 싶었다. 그렇다. 바로 그 이름, 사춘기. 단어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되는 듯한, 그 익숙하고도 낯선 변화들. 그 시절을 지나온 나도 알고 있다. 그 눈빛, 그 침묵, 그 삐딱한 자세 속에 얼마나 많은 불안한 감정이 뭉쳐 있는지를. 그런데도 말한다. 아니, 나도 모르게 말하고 있다.
"허리 펴고 바르게 앉자."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지?"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니?"
사선으로 올려보는 그 눈빛, 말로는 다 하지 못한 억울함, 만사가 귀찮은 피곤함, 어른이라는 존재에 대한 저항 같은 게 섞여 있는 말투. 사춘기가 뭔 벼슬이라도 되냐는 마음으로, 그 눈빛을 기어이 '안 다정한'눈빛으로 받아치는 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건, 가장 성숙한 인내 중 하나라 설명한다. 그렇게 나는 강의실 안에서 자타공인 꼰대가 된다.
하지만 나도 그들도 안다. 해야 함과 하기 싫음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뿐이라는 걸. 세상엔 재밌는 것이 천지에 널렸는데, 하필이면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고 짜증 나는 것을 하기 위해 앉아 있다니. 이해 못 할 나이라는 것 또한 안다. '공부할 때는 집중해서 공부해 보자'라는 말에 '그렇게 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왜 그렇게 말하냐'는 식으로 발끈하는 그들. 억울한 마음이 들만도 하다. 멍하니 있는 순간과 구부정하게 책상 위에 엎드린 자세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렇게나 하기 싫은 공부를 인내심을 가지고 해 나가는 중이다'라고만 들리는 것 같다. 그 노력을 보며 기특하다고는 못할망정, 어른들은 하나같이 '똑바로 해'라는 잔소리만 하고 있으니 억울할 수밖에.
나는 그 나이에 세상이 너무나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른들의 부조리함을 이해할 수 없었고, 부조리한 나 자신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른들의 의미로 훼손된다고 생각했던 시절. 그래서 침묵했고, 엎드렸고, 눈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다가와 주길 바랐던 모순투성이의 시간. 그때의 나를 닮은 아이들이 강의실 안, 내 앞에 앉아있다. 어쩌면 내가 그 시절의 나를 완전히 지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려나, 그들의 눈빛에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들도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허리 펴고 똑바로 앉아서 하자. 그리고 묻는 말에 대답 좀 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알게 될까. 이 시절을 돌아보며 이해할 수 있을까. 알고 보면 수천 가지의 말이 담긴 그 반항적인 눈빛과 몸짓과 침묵은 이미 그 시절을 지나온, 아니 어쩌면 아직도 지나고 있을 나에게, 어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니들이 뭘 알겠니' 라며.
맞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너희처럼 그 시간 안에 있는 건지도 모르지.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찾아오는 슬럼프 앞에서 나는 또다시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다. 그리고 내 안의 꼰대가 다시 주절거린다.
'사춘기는 지나가기라도 하지. 그건 처음 세상을 배워가는 혼란기에 맞는 예방 주사 같은 거니까. 더 살아봐. 살아오는 방식에 금이 가는 순간마다 사춘기보다 더 쎈 놈들이 들이닥칠지도 몰라. 나이 불문, 상황 불문, 이유 불문.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시 허리를 피면 되니까.'
송출실패이려나, 혹은 수신거부이려나.
지나 보면 알 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