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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스타그램의기묘한세계

by 노미화


밀린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허리도 같이 끝장날 것 같다. 식탁 위에 놓인 폰을 집어 들고 솟아오른 승모근과 함께 소파로 직진한다. 잠금패턴을 풀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인스타그램에 들어간다. 엄지손가락이 까딱까딱 운동을 시작하기 직전, 눈에 보이는 첫 게시물. 열 권가량의 책이 탑처럼 쌓여있다.

#5월의책탑 #완독성공 #독서결산 #책스타그램 #북스타그램 #오늘의책




책은 적당이 두꺼워야 하고, 제목은 철학적일수록 좋다. 이왕이면 제목만 봐도 누구나 '아! 이 책! 나도 알아!'라고 공감할 만한 베스트셀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테이블 위 커피 한잔은 고상한 분위기를 살려주고, 배경은 자고로 새하얗고 폭신한 침구 위, 혹은 자연광을 받는 창가. 혹은 자연과 책이 하나 되어 있으면 피드가 더 근사하게 보일 것이다. 내용보다 중요한 건 프레임 속 완벽한 구도이고, 감상보다 훨씬 급한 건 '업로드'이다.


마음보다 먼저 반응을 본다. 좋아요 수가 곧 독서량처럼 느껴진다. 결국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누가 진짜 읽었는지 묻지 않으니까. 책 읽는 사람이 10명 중 4명도 안된다는데. 소셜 미디어 속은 그 반대다. 하루 한 권, 1년에 300권, 심지어 새벽에도 독서. 피드 속 독서량은 정말 미라클 하다. 누구나 책을 읽는다. 심지어 매일 읽는다. 펼친 인문학 서적, 감각적인 문장 인용과 함께 올라오는 #북스타그램 #오늘의한줄 #오늘의문장


희귀하다는 말의 의미가 전복된다. sns 속에서는 모두가 인문학자며, 철학자다. 현실에서는 독서가 '가뭄에 콩 나듯' 드문데, 피드 속 세상은 지적허영으로 넘쳐난다. 책은 살아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죽어있는 정물화가 된다. 정작 주변에는 책 읽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피드에는 책이 흘러넘친다. 물론, 진심으로 읽고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계발을 위해,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순수한 재미를 위해, 조용히 책과 마주 앉은 사람들. 하지만 점점 그 진심조차 '보여주기'와 '팔기'의 사이에서 희미해진다. 혹은 불안해진다. 초심을 읽은 진정성은 어떻게든 아웃풋을 내라는 자본주의의 채찍질 아래 너도 나도 찍어 올리며 강박처럼 쏟아낸다. 책은 개인의 이미지를 연출하는 소품이 되었고, 읽는 행위는 내면의 성찰의 탈을 쓴 외면의 지독한 연출이 되었다.




엄지로 톡톡. 하트가 빨간색으로 채워진다. 엄지로 까딱. 다음 피드가 짠 하고 나타난다. 역시나 책이다. 스크롤 올리기에 열일 중인 엄지는 소파에 가만히 누운 몸뚱이를 툭툭 치며 질책한다. 어서 일어나 어제 읽은 책 리뷰나 쓰라고. 너도 이 기묘한 세계의 일원이 아니냐고. 어서 책탑을 쌓고, 필사를 올리고, 한줄평이라도 남기라고. 빨리 책스타그램의 피드 대열에 합류하라고.


결국 나는 식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주황 전등을 켠다. 잡동사니들을 한쪽으로 밀어놓거나 쌓아둔다. 어차피 프레임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들이라 개의치 않는다. 책을 프레임 한편에 놓고 각도를 바꿔가며 공들여 찍어댄다. 읽는 행위보다 더 큰 공을 사진 한 장에 쏟아붓는다. 은은한 주황 조명 아래, 쨍하게 나온 책의 자태가 곱다.

'그래, 내가 이런 책도 읽었단 말이지. 어떤 감상을 남겨야 그럴듯할까.'

#오늘의책 #완독완료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알고 보면 나의 이야기.



피곤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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