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이제 그만하자. 너 때문에 모든 게 다 망가져버렸어.
아니, 너는 하루 종일 내 생각뿐이잖아.
이제 더 이상은 필요 없어. 지금의 나를 봐. 처참할 뿐이야. 처참해.
그렇지 않아. 내가 있어 행복했잖아. 그렇지 않아? 그 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할 텐데도.
지긋지긋해. 얼마나 더 나를 망칠 생각인 거야. 내 눈에 나타나지 마. 꼴도 보기 싫어. 날 괴롭히지 말고 꺼져.
그렇게 나는 너와의 이별을 선언했다.
감정의 폭발로 시작된 이별 선언의 대상이 사실은 '식욕'이라는 대상으로 드러내는 순간, 피식거렸다. (아무래도 B급감성이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방향을 조금 바꿔서 생각하면 영 웃긴 것도 아니다. 비워낸다는 건 단순히 배를 곯는 일만은 아닐지도 모르니까.
나는 요즘 많은 것에 중독되어 있다. 중독이라는 말이 맞을까. 내가 자발적으로 빠진 게 아니고, 어쩐지 질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다. 음식, 사람, SNS, 인정, 루틴, 감정, 자기 연민, 목적달성, 꿈.... 이건 거의 마음속 편의점 24시간 영업이다. 무언가를 계속 소비하고, 채워 넣고, 또 쌓는다. 그것이 '과함'이 되는 순간부터 일상이 퍽퍽해지고 마음이 조급하며 답답해진다. 꽉 막힌 그것들을 밀어내려 용을 쓴다. 단호하게 잘라내려 하거나, 조급하게 회복하려 한다. 하지만 너무 많이 삼킨 그것들은 소화되지 않는다. 결국, 일상에 급체가 온다.
단식. 더 이상 밀어 넣지 않기. 공복의 시간을 갖는 것. 음식만이 아니라, 사람, 감정, 목표에도 단식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는 각자의 거리차로 인해 오해가 생긴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서로의 초점이 흐려진다.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 껴안고 있으면 삭을 대로 삭아버린다. 왜 이렇게 지쳐 있는지도 모른 채, 무기력의 바닥을 기어 다닌다. 루틴이라는 이름의 통제도, 목표라는 이름의 집착도 그 강박이 지나치면 결국 나를 질식시킨다.
이제는 잠시 헤어져야 한다. 잠시 뒤돌아 서야 한다. 그래도 매달리면 매몰차게 걷어차 버릴 때다.
멀리서 바라볼 거리, 삭힌 감정을 식힐 공기, 다시 숨을 들이마실 작은 공간을 마련한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겠다. 이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도인의 수련도 아니고, 심오한 자기 계발서의 한 페이지도 아니다. 그저 밥공기의 밥을 조금 덜어냈다는 것. 울컥하는 메시지에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 필요에 의해 다가오는 계산적인 관계들을 끊어내는 것, SNS 알림음 소거하고 책을 들었다는 것, 그 책을 덮고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며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는 것, 온갖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촤르륵 계획을 짤 때, 잠깐 그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는 것.
쓰고 보니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소화제 한 알 같은 하루다. 가벼워지고 싶어서 시작한 단식인데, 의외로 마음이 먼저 가벼워진다. 식욕과 이별한 첫날밤. 나는 참 다정한 공복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쉽게 끝날 리는 없다.
밤이 되자, 너는 또 속삭이기 시작했지.
"배고프잖아, 이건 네 몸을 위한 거야.""이건 칼로리 낮아서 살 안 쪄."
이어서, 핸드폰 창에 뜬 각종 메시지와 알림들. 특히 브런치 연재일을 알리는 알림 메시지가 소리 없이 나를 맹렬히 째려본다. '구독자와의 약속'이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보인다.
"오늘 할 일 어서 하고, 인증해야지. 그래야 네가 오늘 뭐라도 한 거 같지."
"다 너를 위한 거야"라며 타박하는 루틴까지.
이별을 선언했던 모든 것들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온다. 살랑살랑, 눈웃음을 치며 속삭인다. "우리...... 잠깐 쉬는 거였잖아?"
'너와 이별할 수 있을까'
나는 속으로 웃는다. 그래, 알지. 돌고 도는 그놈들과 내일도 모레도 또다시 간헐적 이별을 연습하겠지.
어차피 인생은 회전목마니까.
단식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