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누가 필사를 구시대적 취미라 했나

by 노미화

요즘 누가 손으로 글을 쓰나. 스마트폰 하나면 시 한 편도, 장편소설도 단숨에 검색되고 줄거리요약은 기본이며, 각종 서평들만 훑어봐도 어지간한 자리에서는 '그 책 좀 알아'라고 할 수 있는 시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오늘도 노트를 펴고, 펜 뚜껑을 연다. 뭐, 멋있어 보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그냥 좀, 답답해서.


필사는 이상한 짓이다. 남의 글을 굳이 손으로 옮겨 적는다는 건 뭔가 수월하게 남의 창작물을 가져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자 한 자 적는 일은 제법 품을 든다. 문장을 기록하는 방법치고는 확실히 시대에 뒤떨어진 짓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는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독서법'이라고 미화하지만, 실상은 단순하고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고, 또 그걸 다시 읽고, 형광펜으로 덧칠하고. 딱히 창의적일 것도 없다. 아, 예쁜 스티커 몇 개를 붙여 조금 더 예쁘게 꾸민다면 조금 창의적인 '나의 것'이 되려나. 그럼에도 나는 요즘 이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필사(筆寫)를 꽤나 필사(必死)적으로 하고 있다.


왜일까?


필사가 유행이라지만, 그 흐름에 편승하고 싶은 건 아니다. 대단한 깨달음을 얻겠다는 야심도 없다. 다만 필사를 하다 보면 묘하게 나 자신이 조금 덜 멍청해지는 기분이 든다. 남의 문장을 베껴 적으면서 '나는 이런 표현은 못하겠군'하고 인정하게 되고. 동시에 '그래, 나도 언젠가는 이런 걸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긴다. 한마디로 자존심과 열등감이 교대로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 시간, 그게 바로 필사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매일이고 글을 쓴다는 건(특히나 일기 이상의 그 어떤 것들을 쓰고 싶은 갈망이 강할 때에는 더욱이) 여러모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매일 쓰는 삶. 생각보다 더 치열하고 벅차다. 오로지 내면을 위한 글쓰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쓴다. 뭐라도 쓴다. 뭐라도 남겠지라는 마음으로 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에 약간의 부하가 걸린다. 그럴 때는 책을 펼친다.


요즘은 틈나는 대로 책을 읽는다. 아니, 파먹는다. 이 표현이 딱이다. '무엇을 써야 되나'를 망각하기 위해 타인의 문장을 씹어 삼키는 기분이니까. 잘 읽지 않았던 소설도 쌓아두고 조금씩 파헤치듯 읽고 있다. 무엇을 쓸까의 고민 혹은 '내글 구려병'의 도짐이 자연스레 책이라는 피난처로 나를 이끄는 것이다. 필사는 그 곁에 따라붙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닫는다. 필사가 읽기와 쓰기의 균형을 잡아주는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걸. 쓰는 게 버겁고 부담 될 때, 나는 읽는 쪽으로 물러선다. 그러다 문장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면, 남의 글이라도 따라 적으며 내 생각을 건져 올린다. 그걸 다시 소재 삼아 또 글을 쓴다. 지금처럼 이렇게 브런치에 올릴지도 모른다. 그 사이클이 요즘의 나를 간신히 굴러가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사실 필사의 가장 큰 매력은,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창조'해야 한다는 부담이 전혀 없다. 이미 누군가가 쓴 멋진 문장을 그냥 베껴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 단순함 속에서 문장은 묘하게 깊게 박힌다. 활자만 읽을 땐 그냥 지나쳤던 문장을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적다 보면 내 마음에도 또렷이 새겨지는 기분이다. 다소 과장하자면, '그 문장은 내가 소화시켜 버릴 영양제다'라는 느낌이랄까. '그대로 흡수되어, 내 문장력 강화에 일조하거라.' 진심 반, 농담 반.


물론 필사를 한다고 대단한 글쟁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적는다고, 베껴 쓴다고 실력이 늘겠냐'라는 회의도 든다. 그래도 나는 계속 쓴다. 왜냐고, 그냥 하는 거다.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꾸준히 한다는 건, 요즘 세상에선 꽤나 반항적인 행위니까. 반골기질이 다분하며, 의미부여를 좋아하는 나에게 필사만큼 소박한 반항도 없다. (참 소박한 반항이다) 그러니까 필사는 나에게 일종의 저항이다. 효율을 강요받는 삶 속에서 비효율을 고집하는 고요한 저항. 쓸모없어 보이는, 창조가 아닌 모방을 배움이라 여기는 나다운 합리화를 곁들인 그런 반항 말이다. 이렇게 까지 말하는 나를 보니 농담치고는 너무나 노골적인 간절함 같아 보인다.


필사를 이렇게나 공들여한 적이 있었나 싶다. 한 번씩은 나도 못 알아먹는 글씨라(손글씨를 귀찮아함이 아마 가장 큰 요인이겠지만) 쓰는 걸 별로 즐기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단상이나 발췌문장들은 여기저기 아무 데나 적어놓는 바람에 다 쓰지 못한 노트들이 군데군데 꽂혀 있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예쁘게 정리된 필사 노트를 바라보며, 아주 잠깐 뿌듯해지기도 한다.


이것은 내가 쓴 문장이 아닌데, 마치 내가 쓴 문장인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내 생각인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내 것은 분명히 아니니. 그 문장에 대한 내 생각도 이참에 한번 적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도 든단 말이지.


횡설수설하고 있지만, 결론은 필사가 '쓰는 일'과 '읽는 일'을 자연스레 연결해 주는 아주 좋은 수단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쓰고 싶어서 읽고, 읽다가 또 쓰고 싶어진다.


늦은 밤, 식탁에 앉아 어느 시인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 조용히 펜으로 시인의 문장을 따라 걸어본다.

필사(筆寫)적으로.





스스로가 채널이자 매체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다양해지는 것, 다양성을 품은 채 많은 양을 확보하는 것. 쓰는 일은 '말하고 듣고(독서) 생각하기'를 동시에 하는 일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무언가를 쓴다면, 쓰면서 꾸준히 성장한다면! 그야말로 유토피아다. (p121)

누가 말려도 들리지 않는 일. 그저 좋아서 하고 하고 또 하는 일. 대가? 일단 그런 건 천천히 생각하자. 나 중에 저절로 얻게 된다면 모르지만, 우선은 그냥 좋아서 그 일을 하자. 그런 걸 찾았다면 절대 놓치지 말고, 함께 오래 살아야 한다. (p145)

박연준, <쓰는 기분>중에서



함께 오래 살아야 한다.




keyword
이전 09화박치의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