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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의 연주

by 노미화
더 이상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지 않는 삶을 살 순 없다. 깨트리기! 쓴다는 건 멀쩡히 굴러가는 삶을 깨트리는 일이다. 깨트린 뒤 다시 조합해 새로 만드는 일이다. (...) "새로운 사람, 동물, 꿈, 사건"이 생기려면 무언가를 사랑하고 뛰어들고 다치고 도망가고 잡고 빼앗기고 슬퍼하고 으깨져야 한다. 가만히 두면 마음은 굳는다. 움직여야 한다. (p10)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지, 당신이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연필을 쥔 사람은 자기 삶의 지휘자가 될 수 있다고.(p11)
박연준, <쓰는 기분>중에서


자기 삶의 지휘자라. 지휘가 불가능한 삶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지휘가 엉망이라 삶도 엉망인 경우도. 그렇다면 '지휘력'이란건, 깨지고 다치고 도망하고 잡고 빼앗기고 슬퍼하고 으깨지면서 생기는 것일까. 오늘 연재글의 도입부가 삐걱대는 걸 보니 이번 글은 불협화음으로 끝나려나. 뭐 어때, 사는 게 불협화음인데.


이왕 이렇게 시작한 거 제대로 삐걱거리는 공연을 해보자.


악보도 없고, 무대도 없고, 지휘봉은 자꾸 손에서 미끄러진다. '불안'연주자는 제 멋대로 북을 치고, '후회'연주자는 줄이 늘어질 대로 늘어진 현악기가 되어버린다. 나는 아직 시작 신호도 안 보냈는데 음악이 벌써 시작돼 있다. 이미 수많은 박자를 놓쳤다. 그리고 그걸 알아채는 순간, 불협화음에 위기가 온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휘봉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그래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순간, 불협화음은 절정에 달한다. '기대'연주자가 갑자기 무대 한복판으로 튀어나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걸 본 '두려움'연주자는 불안한 악보의 두세 마디를 건너뛰고 다음 장으로 휙 넘어가버린다. 뒤늦게 악기를 잡은 '슬픔'과 '자책'은 상심하여 박자를 무시하고 그대로 눌러앉아버린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이걸 가만히 둬야 해? 내 안의 지휘자는 어쩌면 연주를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소음을 견디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공연은 그야말로 완벽한 '엉망'이다.


지휘력이 영 신통찮은 나는 결심한다.

다시. 아니, 다르게.


기존의 공연은 망했다. 지휘봉을 내려놓는 순간, 아름답게 망가졌고 조용히 박살 났다. 잘 된 일이다. 그 공연은 끝내야 했던 거다. 나는 다시 무대를 만든다. 이번엔 악보도, 조명도, 근사한 지휘봉도 없다. 연주는 맨몸으로 한다. 기교도 없다. 꾸밈도 없다. 진심만으로. 이번엔 지휘자도 아니고 관객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음이 되어본다. 떨리더라도 튕기더라도 틀리더라도 나는 그 소리 자체로 서있기로 한다.


지금 나의 글이 그러한 것처럼.

나의 감정이 그러한 것처럼.

이런 불협화음 속에서 무엇이 만들어질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계속 써보는 걸로.

가만히 두면 굳는다고 하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연주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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