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기억나지? 우리 저번에 왔었잖아. 그때도 진짜 예쁜 곳이었는데.”
“음……. 잘 기억이 안 나.”
“저번에 먹었을 때 진짜 맛있었는데.”
“음……. 잘 기억이 안 나.”
“여긴 어떻게 하나도 변한 게 없지? 그대로네. 그렇지?”
“음……. 잘 기억이 안 나.”
“나랑 결혼한 거는 기억하니?”
비싼 돈 주고 수학 공부시켰는데 중간고사 시험 망쳐온 학부모의 마음이 딱 이러할까. 이것도 기억이 안 나냐고 면박을 주면 입술을 샐쭉거리며 불만을 표현한다. 남편은 감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다. 여행을 가면 방방 뛰고 손뼉 치며 좋아하고 있을 때, 고개를 돌려보면 돌부처가 내 옆에서 같은 곳을 보고 있다. “너무 좋다 그렇지?”라고 물으면, “좋네!”라는 밋밋한 피드백이 돌아온다. 잔잔한 호숫가에 작은 악동이 와서 양손에 돌멩이를 마구마구 던져도 파문이 일다가 금세 사라진다. 재미없어진 악동은 다시 혼자 흥에 겨워 사진도 찍고 감탄사도 연발하며 감흥의 파동을 보낸다. 그 파동은 조용한 호수에 닿아 ‘좋네.’라는 말과 함께 상쇄되어 버린다. 시간이 지나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기억과 감상을 묻지만, 돌멩이들은 여전히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아있다. 떠오를 수도 건져 올릴 수도 없는가 보다. ‘기억이 잘 안 나’. 그런데도 같이 간 여행들은 하나같이 좋았다고 한다. 뭐가 좋은지도 모르지만 일단 좋았다고 한다. 돌부처의 티도 안 나는 감흥이 망각을 이기는 순간이다. 분명 파문은 일었었나 보다. 그 감흥의 잔상은 기억에 남아 있나보다. 어떤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켰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를 생각해 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도구가 필요할 때도 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어느 작가들은 글이 안 써지면 산책을 한다거나 책을 읽는다고 한다. 나 역시 책에서 글감을 찾을 때도 있지만 내가 주로 쓰는 방법은 사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별 걸 다 찍어서 남겨 놓는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그 ‘별게 다’가 글감이 될 때가 많다. 오늘만 해도 여섯 살 아이가 접고 자르고 구겨서 만들어 놓은 작품들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물론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확률이 높은 예쁜 쓰레기가 되겠지만 나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부러 사진을 찍었다. 프레임 안에는 없지만, 칭찬받고 싶은 아이의 표정이 절로 떠오르는 한 장면을 기어이 남겨 놓았다. 별거 아닌 것 같은 그 순간은 ‘자유로운 꼬마 예술가’라는 글감으로 내 메모장에 기록되었다. 모양도 형식도 없는 종이 접기지만, 여섯 살 아이의 시선에서는 종이 한 장으로 우주도 만들 수 있으니.
사진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봤다. 내 눈이 머물렀던 한순간이 담긴 사각 프레임. 평면적이면서 무한히 입체적인 그것은 나에겐 기록의 방과 같다. 깊은 기억의 방. 또 다른 기억의 방까지 연결되어 있는 복잡 미묘한 방. 같은 사진이라도 볼 때마다 매번 그 감상이 달라진다. 사진 속 배경이 주는 느낌은 물론 사진 속에 찍힌 인물들의 표정과 행동까지 사각 프레임 속에 들어있다. 사진에는 여백이 있을지언정 공백은 없다. 내가 놓친 이야기들과 감상도 여백 속에 분명 존재했다. 그러면 나의 흐렸던 기억은 감탄과 감상을 오가며 담금질이 시작된다. 기억의 담금질로 단단하고 견고한 생각들이 만들어지면 나는 그것을 글감으로 가져갈 수가 있었다. 별 걸 다 찍어놓는 일이 유용하다는 걸 글을 쓰면서 확신했고, 별 걸 다 찍어놓기를 좋아하는, 그런 쪽으로는 또 부지런한 나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아쉽게도 나의 어린 시절은 주로 내 기억 속의 방에 흐릿한 채로 머물러 있다.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여행도 사진도 많이 남겨 놓지 못했다. 과거는 지극히 내 감정의 기억에 지나지 않았고, 쓰기 전까지는 그게 진실인 줄 알았다. 의식적인 피해의식에 사로 잡혀있었다. 글쓰기로 나의 감정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 그 기억과 생각들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나로 인해 왜곡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미치자 조금 두려웠다. 몇 남지 않은 사진들은 나의 시선으로 찍은 것들이 아니기에 아무리 직관적으로 본다 해도 충분히 나의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주춤했다. 특히나 아버지에 대한 글을 적을 때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다.
‘당신을 미워하고 원망스러워하던 딸이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온전한 이해는 뒤늦게 불현듯 찾아온다는데, 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쓰면서 알고 싶습니다. 닫혀있던 당신의 세계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열리는지. 혹은 내가 당신으로부터 내 세계를 닫고 있었던 건 아닌지 말이에요. 당신은 나의 아픔이었다는 말을 한 이기적인 딸이었습니다. 그 말이 당신을 찌르는 말인지 되려 나를 찌르는 말인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나도 알고 싶습니다. 깊은 곳에서 한두 개씩 올라오는 기포들이 어떤 소리를 내며 터질지는 모르겠지만, 후회든 원망이든 죄책감이든 그리움이든 사랑이든, 그것들이 무엇이 되는지 한번 써 내려가보겠습니다. 당신을. 나를.’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는 글의 담금질은 사진으로 떠 올리는 기억의 담금질과는 확실히 다르며 왜곡되어 있다. 그 사실 또한 쓰면서 알게 되었다. 내 눈으로 본 기억들이 아닌, 내가 겪었던 기억만 가지고 내 방식대로 써 내려갈 자격이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혹시나 쓴다고 하더라도 어느 누구도 다치지 않을 진실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나의 글쓰기를 고민하게 했다. 이런 글들 대부분은 ‘잡동사니’ 폴더로 차곡차곡 모아 수시로 들여다보며 기억의 담금질을 하는 중이다. 어떤 식으로 풀릴지는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래서 계속 쓰고 싶다.
최근에는 핸드폰 사진첩을 정리했다. 2만 개 정도 되는 사진과 영상들. 이런 건 왜 찍어놨을까 싶은 것도 몇 장씩 발견된다. 카메라폰이 나오기 시작하고부터는 셀카를 비롯하여 뭐든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여행이든 일상이든 책이든 사람이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습관처럼 영상 또는 사진으로 기록해 왔다. 외장 하드 1 테라짜리 몇 개씩 보유 중인 조금 과한 일상수집가, 기록중독자라 자부한다. ‘언젠가는 쓸 데가 다 있겠지’에 의미를 두고 기억의 방에 차곡차곡 스토리를 쌓아본다. 쌓인 스토리가 글감이 되고, 다시 얽히고설켜 새로운 의미를 낳을지도 모른다. 언제든지 들어가 수시로 담금질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방을 만들 것이니, 나는 방문을 열기만 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