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보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 오늘 바다 색깔 진짜 예쁘겠는데? 조금 있다가 바다 노을 보러 가자.”
노을빛보다 바닷물빛보다 바닷가에서 꼬물거리는 작은 생물들을 잡으러 가는 목적이 더 크겠지만 티끌하나 없는 푸른 하늘을 보고 있자니, 마음은 이미 노을이 물든 바다를 그리고 있었다.
가을의 초입, 햇빛은 따가웠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바다는 하늘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아이들은 소라게와 고둥을 줍는다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뒤집으며 신이 났다. 나는 그 옆에 서서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수평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남해의 바다는 그렇다. 진한 펜으로 선을 분명하게 그어놓은 동해의 수평선과는 달리 남해의 수평선 경계는 동해의 그것보다 희미하다. 하늘색을 그라데이션을 한 듯한 그곳을 보고 있으면 나는 마치 모호한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수평선 밑으로는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고, 그 위로는 티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하늘빛은 바다에 그대로 내려앉았다. 미처 산란되지 못한 파장의 빛은 윤슬이 되어 보석을 뿌려놓은 것처럼 파도와 함께 일렁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반짝이는 빛깔들은 금세 흩어져버리고 다시 또 새로이 수면 위에 내려앉는다. 반면 바다 밑 푸르고 짙은 빛깔만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바다는 수면 위에서 순간의 빛을 품어내면서도 깊은 수심의 짙은 색처럼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다. 문득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생각했다. 수면 위의 빛들처럼 겉으로는 여러 감정과 생각이 떠다닐지라도,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내가 어떻게 비치더라도, 내 안의 깊은 바다는 고유한 빛깔을 가지길 바랐다.
첫째 아이가 제법 큰 소라게 한 마리를 가져와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엄마, 잘 봐바. 가만히 있으면 안에서 작은 게가 나와서 기어갈 거야. 쉿! 조용히 해야 해.” 잠시 뒤, 소라입구에 작은 발들이 꼬물거리며 나온다. 아이의 손바닥을 빠른 속도로 기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잽싸게 탈출하는데 성공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두 아이는 또 뭐가 그리도 재미가 있는지 낄낄거리며 다시 돌멩이를 들추며 작은 생물들을 찾기 시작한다. “재미있니?”라는 물음에 두 아이는 합이라도 맞춘 듯 대답한다. “너무 재밌어, 엄마.”
나도 호기심이 일었다. 두 꼬맹이의 관심을 사로잡은 그 작은 생물들의 세계를 한번 들여다보고 싶었다. 신발이 젖지 않도록 조심하며 자박자박 자갈들을 밟으며 해변을 따라 걸었다. 발의 진동에 작은 생물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갔다. 해변의 경계에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 하나를 뒤집었다. 손톱만 한 고둥 2개가 붙어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옆에 조금 더 큰 돌을 뒤집는 순간 게 한 마리가 잽싸게 다른 돌밑으로 숨어버렸다. 게를 맨손으로 잡을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그 옆의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워 바다 위로 던져버렸다. 파문이 일었고 바다물결이 금세 파문을 잡아먹어 잔잔해졌다. 일어나는 순간, 손이 닿을만한 거리의 얕은 바닷속에 작은 물고기들이 빠른 속도로 도망가는 게 보였다. 망둑어였다. 허리를 숙여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새우, 꼬물거리며 분주한 고둥, 생각보다 잽싼 소라게,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게 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얘들아, 여기 빨리 와봐. 여기 뭐가 진짜 많아!” “엄마, 그걸 이제 봤어? 우리는 아까부터 망둑어 잡고 있었는데, 오늘 망둑어 한 마리는 꼭 잡고 집에 갈 거야. 그런 줄 알아.” 그제야 아이들의 눈이 왜 그토록 바닥에 꽂혀 있었는지, 해변의 모든 돌멩이들을 들쑤시고 다녔는지, 신발이 다 젖도록 통을 가지고 연신 바닷물을 퍼냈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신이 난 꼬마들은 평화롭고 고요한 세계에 혼란과 소란을 일으킨 빌런들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어이없고 귀엽고 웃겨서, 해변에서 몇 걸음 떨어져 나와 그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푸른 하늘, 하늘을 닮은 고요한 바다, 그 안에 소란스러운 작은 세계, 그리고 쪼그려 앉은 두 악동의 뒷모습.
고요하고 진지했던 나의 사색들은 빛의 입자가 여기저기 부딪쳐 산란되듯 아이들의 모습 덕분에 꾀나 우습고 재미있는 생각들로 산란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진지했던 생각들도, 유쾌한 일들도, 아이들의 목소리도, 그림 같은 풍경들도 하나하나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러는 사이 태양의 고도는 낮아졌고 하늘빛과 물빛이 조금 달라졌다. 하늘에 물드는 바다는 마치 카멜레온이 변색하는 것처럼 보였다. 매 순간 달라지는 하늘빛에 따라 바닷물빛도 시시각각 변했다. 도착했을 때의 투명하고 푸른 물빛은 조금 더 짙어졌고 윤슬의 범위는 더 넓어졌다. 태양이 수평선 가까이 내려왔다. 바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노랗고 붉은빛을 끌어안았다. 한 주간의 복잡다단했던 마음, 소란스러웠던 감정들도 하나둘씩 가라앉으며 물드는 노을빛을 따라 차분히 잠겨버렸다.
나는 가끔 내 생각들이 흩어져 어디로 가는지, 어떤 형태를 띠는지 모를 때가 있다. 빛이 바다에 닿아 산란되고 흩어지듯, 나의 수많은 생각이 흩어지곤 한다. 어떤 생각은 증발하듯 금세 사라져 버리고, 어떤 생각은 깊이 남아 나를 붙잡았다. 순간의 생각들과 감정들은 흩어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빛 아래에서 다른 의미로 떠오를 때도 있었다. 어떤 날은 가볍고 맑은 생각들이 떠올라 마치 높은 고도의 햇빛이 바다표면에 닿아 산산이 흩어져 그저 하늘과 바다를 반사하며 물결을 따라 흐르기도 했고, 어떤 날의 생각은 무겁고 깊어져 깊은 수심의 바다밑바닥까지 흡수되어버리기도 했다.
빛이 산란하듯 생각도 흩어졌지만, 결국 그 흩어진 빛의 일부는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이 붉은빛이든 파란빛이든, 그 색깔이 달라진다 해도 중요한 것은 결국 나에게도 다시 돌아오는, 나의 감정과 생각을 더 명확하게 만들어주는 빛이라는 것이었다. 순간의 빛을 품어내면서도 자신의 본질을 잃지 않는 바다처럼 그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산란된 생각들을 품어내며 내 안의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발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해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바다색은 더없이 어두워졌고, 하늘은 그런 바다를 놀리기라도 하는 듯 황홀한 색감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엄마, 하늘 좀 봐!” 우리는 한참 동안 분홍빛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구름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이 보인다면 아이들이 또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엄마, 오늘 바다 색깔 진짜 예쁘겠는데? 조금 있다가 바다 노을 보러 가자.”
해가 지는 바다는 생각을 버리고 담아내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인 것 같다. 더군다나 진지하기만 한 생각을 흩어지게 만드는 작은 악동들과 함께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