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억
출근길 아침, 코트의 벌어진 깃과 소맷단 사이로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겨울 추위에는 살이 시리지만 봄추위에는 뼈가 시리다더니.... 코트를 여미다가 집에서 헐레벌떡 나오느라 거울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한 게 생각났다. 좁은 골목길 사이를 성큼성큼 걸으면서 건물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흘낏흘낏 살펴보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남은 세월 동안 출근해 왔지만, 아침마다 화장하고 출근하는 내 모습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
내 앞에 삼십 대로 보이는 여자와 일곱 살 정도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들 역시 지하철을 타려는지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오전 일곱 시 반에 이들은 어디에 가는 길일까. 호기심이 일어 걸음 속도를 늦추고 두 사람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걷기 시작했다. 아이가 여자를 향해 엄마, 하고 부르며 사랑스럽게 재잘대자, 여자도 눈에 미소를 가득 담은 채 아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맞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몸은 좌우로 살랑살랑 움직이면서 경쾌하게 걷는 모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인 엄마의 긴 머리카락이 햇살에 반사되었기 때문이었을까, 엄마 등에 멘 가방의 반짝이는 금박이 장식 때문이었을까. 눈앞에 황금 나비 두 마리가 팔랑대며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모녀의 뒤로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을 관찰하며 걸었다. 연분홍색 에이라인 반코트를 입은 딸아이는 등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땋아 내리고 코트와 같은 색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이렇게 머리 손질을 하고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아이 엄마를 살펴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조금만 꾸미면 세련된 아름다움이 환하게 빛날 외모를 감출 수 없었다. 아이를 단장해 주기 위해 본인은 순수한 차림으로 나섰지만, 아이가 없던 시절에는 멋쟁이였을 것이다. 엄마가 멘 가방을 다시금 살펴보니 연보라색 아이 가방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색상인가 보다. 추위가 다 가시고 주변에 연보랏빛 제비꽃이 만개한 듯했다.
모녀를 뒤따라 지하철 승강장으로 걸어 내려갔다. 이들은 아마도 어디 멀리 있는 체험학습 장소에 가는 길인 듯했다. 모녀 구경하며 길을 걸은 덕분에 출근길의 피로감도, 봄철 추위도 깨끗이 잊었다. 두 사람이 여전히 손을 꼭 잡은 채 초승달 모양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소곤소곤 대화 나누며 작은 소리로 깔깔 웃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의 모습이 나만 보기 좋았던 건 아니었나 보다. 등산복 입고 배낭 멘 아저씨 한 분이 모녀를 쓱 지나치다가 뒤돌아서서 말을 건넸다. "좋은 데 가나 봐요? 아주 행복해 보이네요. 엄마랑 즐거운 하루 보내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모녀를 지나쳐 걸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오랫동안 소중한 기억으로 남길. 엄마든, 딸이든 인생에서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 이 빛나는 추억이 어두움을 밝히는 힘이 되어주길....’
그날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터벅터벅 골목길을 걷다가 우두커니 서서 건물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문구점 먼지에 뒤덮이고, 분식집 기름에 찌들었던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힘든 나날을 견뎌내면서도 나를 발견하면 환하게 웃으며 두 팔 크게 벌려 품에 안아줬던 엄마. 나를 기다리고 있을 아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그 녀석을 꼭 끌어안고 토닥거리고 싶은 마음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집에 들어가면 아이 손을 잡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들어줘야지. 그리고 아들이 내뱉는 소소한 농담에도 깔깔대면서 따뜻한 밥을 지어 먹여야지. 오늘밤, 우리 집에도 봄이 찾아오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