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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딸

06. 방석

by 허니베리


일단 입원실이 있는 집 근처 2차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이곳에라도 모셔야 안심될 것 같았다.


의사는 아버지와 진료 의뢰서를 살펴보더니 두 번 연속해서 혈당을 쟀다. 혈당측정기에서는 반복하여 하이(High) 문구가 뜨며 경고음이 삐삐 울렸다. 의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경고기처럼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아버님을 돌려보낸 병원이 대체 어디예요? 우리 병원에도 입원실은 있지만, 당직 의료진이 부족해서 응급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에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급종합병원 응급실로 가셔야 해요.”

집게손가락을 허공에 크게 휘두르는 의사의 모습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앉아 있기도 힘든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를 찾아 나선단 말인가.


일단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자리에 눕혔다.

아버지가 쉬시는 동안 무작정 입원을 꾸리기 시작했다. 그때,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OO 병원 응급실은 환자를 받아주나 봐. 그쪽으로 이동해. 나도 서둘러 갈게.”


오빠가 알려준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환자분 성함은요?"

아버지는 본인 확인을 위한 답변도 어려워하셨다.

“최OO세요.”

“보호자 성함은요?”

“이OO입니다.”

“관계는요?

“딸이에요. 저희 아버지시고요.” 아버지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답했다.

직원이 나와 아버지 얼굴을 흘깃 살펴보았다.


입국 심사대에 선 난민처럼, 숨죽이며 접수처 직원의 눈치를 봤다.

이곳에서도 우리 부녀를 거절한다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용지를 출력하는 직원의 손짓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저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다시 한번 환자분의 생년월일과 성함 확인하고, 우선 피부터 뽑겠습니다.”

직원의 말을 듣자, 마치 영하의 날씨에 뜨겁게 데운 술을 마신 것처럼 온몸에 안도감이 퍼졌다.

응급실로 이어지는 복도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으로 연결되는 통로 같았다.


아버지는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방에 배정받으셨다. 바로 맞은편에는 의료진 데스크가 일렬로 위치했다.

엑스레이를 찍고, 몇몇 검사를 마친 뒤 복부에 인슐린 주사를 놓았다. 하지만 주사가 소용없자, 펌프로 인슐린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의료진이 수차례 들락거리며 약물을 주입했음에도 혈당 수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의료진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내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아버지 곁을 서성이는 내게 의사가 조용히 귀띔했다.

“혈당이 워낙 높아 합병증이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어요. 심전도상 이상 소견도 보이는데, 심장 쪽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요.”


아버지에게 다가가 접이의자에 앉았다.

몸에 주렁주렁 달린 줄들이 엉켜있었다. 줄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의 팔다리에 넓게 퍼진 보라색 멍을 발견했다. 소맷단을 들추어 멍을 살피며 어루만졌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 소리가 새나왔다.


“며칠 전 계단에서 넘어졌어. 심하게는 아니고.”

입맛 없다고, 계속 입이 마른다고 하실 때 아버지 증상에 관해 최소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 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군가가 내게 거칠게 쏘아붙이는 것만 같았다.


“손발이 저리고 뒤틀린다. 좀 주물러 줄 수 있니?”


그동안 아버지께서 내게 부탁이라는 걸 하신 적이 있던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내게 요청하시기까지 얼마나 참고 망설이셨을까.


관절염으로 잘 구부러지지 않는 손가락을 오므렸다 펴며 아버지를 주물렀다. 뻣뻣하고 더딘 손의 움직임이 아버지를 지켜보는 내 심장의 리듬 같았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가 가까웠다. 보호자는 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나도 목이 마르고 허기가 져서 손발이 저린 지 오래였다.


아버지는 계속되는 요의를 참지 못하고 소변 실수를 하셨다. 소변기를 이용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힘겨워하셨다. 머리카락부터 신코까지 흐트러짐을 허락지 않으시던 분이. 아버지께는 이 모습이, 병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일 수 있다.


“오빠가 밖에 와 있어요. 오빠 불러드릴까요?”

명절 때나 볼 수 있는 아들이잖아요. 그래도 아버지 편찮으시다고 하니까 달려왔네요.


아버지께서 잠시 숨을 고르시더니 답하셨다.

“아니, 네가 있어 주면 좋겠구나. 네가 편해.”

말씀하시고는 한 쪽 눈을 찡그리셨다. 그 표정은 아버지가 업어 키우신 내 아들이 미안할 때 짓는 표정이기도 하다.


응급실을 벗어나려던 시도를 멈추고, 다시 아버지 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아버지 입에서 흘러 나오는 옅은 신음이 이 말로 번역되어 들렸다.

'너는 진짜 내 딸이야. 내 가족이야.'


딱딱한 의자에 푹신한 방석이 놓인 듯했다. 조금은 더 편안해졌다.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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