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과 웬디의 선택

by 허니베리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밤 아홉 시.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이 한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 커서 뭐가 되려고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잘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아들은 잠들기 전 곁에 누워있어 달라며 내 치맛자락을 잡아끌었다. 아직은 꼬맹이라 엄마가 옆에 있는 것이 선물 같겠지만, 몇 년만 지나면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겠지.


이 시간까지 엄마를 기다렸을 아이가 애처로워 피곤한 몸을 웅크리고 아이 곁에 누웠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밝은 목소리로 재잘댔다.


"엄마, 나는 군대 가면 아빠처럼 장교가 되고 싶어. 장교가 된 다음에는 장군, 총사령관, 국방부 장관도 될 수 있는 거지?"

며칠 전, 아빠가 들려준 군대 이야기가 생각났나 보다. 군복을 멋지게 차려입고 어깨에 별을 하나씩 달아가는 늠름한 아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한자 공부도 열심히 하는 우리 아들인데 국방부 장관이라고 못 할 건 없지.”

한자 공부와 국방부 장관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스스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고슴도치 엄마답게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난 직업군인 될 생각은 없는데?”

...... 장교가 되고 싶다는 아들의 말과 그 뒤에 이어진 질문에 나 혼자 너무 앞서갔다.

“그러면 뭐가 되고 싶은데?”

"요리사! 식당도 열거야." 뜻밖의 답에 살짝 당황했다.

“고급 식당?” 나도 모르게 욕심이 삐죽 올라왔다.

“아니, 그냥 보통 식당.”


내 상상 속에서 국방부 장관 옷을 입고 있던 아들은 셰프 가운도 아닌, 얼룩 묻은 앞치마를 둘러맨 ‘보통 식당’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아들이 실제로 장관직을 거절하고 동네에서 식당을 차리겠다고 선언한 것 같은 아쉬움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자신의 계획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는 아들을 보니 다시금 가슴이 벅차올랐다.


“식당에서 팔 메뉴도 정했어. 아빠가 주말에 해주시는 볶음밥이랑, 특별한 날에 만들어 주시는 음식. 요리 준비도 하고 나도 좀 쉬어야 하니까 하루에 딱 50인분만 팔려고. 아, 맞다! 가게 이름은 ‘행복한 식당’이야. 이곳에서 밥 먹으면 행복할 테니까.”

아들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달뜬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어둠 속에서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을 생각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들어온 이직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이직하면 소득은 훨씬 높아지지만, 포기해야 할 것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대체 그 포기해야 하는 게 뭔지 묻자, 남편은 진지하게 답했다.

주말 아침에 아이를 위해 요리하기, 아이와 함께 베란다 텃밭 가꾸기, 겨울이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하기 등.

그가 열거하는 이유를 들으며 피터팬이 떠올라서 한숨지었다. 피터팬! 좋게 말해 순수한 거지, 웬디의 고생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 세계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피터팬은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게 아닌가?


돈과 명성 대신 아이와 보내는 작은 시간 조각을 선택한 남편으로 인해 나는 네버랜드에서 사는 웬디만큼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어왔다. 따라서 이젠 제발 ‘남들처럼, 어른답게’ 살면 안 되겠냐고 남편을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오늘 밤, 아빠와 만든 추억의 샘에서 퐁퐁 솟아나는 행복감으로 젖어있는 아이를 보면서, 남편이야말로 ‘남들과는 다른,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리의 보물이 아빠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사회적 성취 포기’라는 어려운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나는, 남편을 설득하는 대신 내가 좀 고생하더라도 그와 함께 ‘순수의 땅’에서 더 머물러야겠다고 마음을 돌이켰다. 남편과 아이가 심은 꽃이 향기를 발하고 나비가 춤추는 이곳에서. 편안한 삶에 대해 못내 아쉬움은 남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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