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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oneyberry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각

어느 봄날 순희의 일기

by 허니베리

곧 3월이지만 창밖에는 한겨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여전히 희끄무레했고, 사람들은 긴 외투의 깃을 움켜잡고 총총거리며 움직였다.

순희는 두툼한 점퍼를 걸쳐 입고 문밖으로 나섰다. 정작 밖에 나오니,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봄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봄이 오긴 오는구나.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고, 진달래 피는 곳에 구경 가기 위해서는 새 옷이 필요하다.


시내에서 볼일을 마친 순희는 근처에 있는 옷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안에서 홀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주인이 순희를 반갑게 맞았다.
순희는 ‘세일’이라는 표지판이 꽂힌 가판대 위에 얌전하게 누워있는 청바지를 집어 들어 몸에 대봤다.
‘오, 치수가 나한테 딱 맞을 것 같은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출렁이는 배를 쓰다듬으며 순희 곁으로 다가왔다.

“손님, 그건 남자 거예요. 제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제품이고요. 여성분 바지는 저쪽에 있어요.”
얼굴을 흘끔 쳐다보니 순희 또래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여자 건 세일하는 게 없나요?”
“물론 있지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시나요?”
순희가 자신의 치수를 말하자, 가게 주인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레 연기했다.
“에이, 그렇게 안 보이시는데요.”
“살이 다 배에 집중돼 있거든요.”

순희는 씩 웃고는 손바닥으로 배를 탁탁 두드리면서 피팅실로 들어갔다.

“봄에 입을 거라서 내복을 벗고 입으니 살짝 여유가 있네요. 더 작은 것도 입어 봐도 될까요?”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은밀한 내부정보까지 공개한 순희는 사장이 내민 한 치수 작은 바지로 갈아입었다. 간신히 바지 지퍼를 잠그자, 미세하게 호흡이 곤란하고 움직일 때도 부자연스러운 동작이 나왔다.

“사장님, 바지가 끼는지 한번 봐주실래요?”

순희는 티셔츠를 허리까지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뒷모습이 잘 보이도록 배려해 주었다. 가게 주인은 전문가답게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순희의 뒤태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바지 좀 잡아당겨 봐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럼요.”
가게 주인은 양쪽 검지를 살짝 구부려서 순희가 입고 있는 바지의 오른쪽 왼쪽 주머니에 살짝 걸치더니 아래로 휙 잡아당겼다. 물론 바지는 순희의 뱃살과 골반에 걸려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 이거 전혀 여유가 없네요. 아무래도 위 치수로 입으시는 게 손님이 더 편하게 느끼실 것 같아요. 불편하면 손이 안 가잖아요.”
“음... 핏은 이게 더 예쁜 것 같은데 아쉽네요.”

잠시 고민하던 주인이 물었다.
“그러면 저런 하이웨이스트는 어떠세요?”
“지난겨울에 그런 디자인을 샀는데, 입을 때마다 살 정리가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뱃살을 잘 쓸어 모아서 간신히 허리를 잠그면 배에 축구공을 넣은 것처럼 보이고요. 하하하!”
그 순간, 계속해서 침착함을 유지하던 가게 주인이 더는 못 참겠는지 ‘흠흠’ 헛기침하며 돌아섰다.

주인의 헛기침 소리에 마법이 풀린 것처럼 순희에게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문득 거울에 비친 진한 일자 눈썹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틀 전 문신의 흔적이었다. 만화 주인공 말썽쟁이 짱구도 아니고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이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마흔이 훌쩍 넘으니 부끄러움을 느끼는 감각이 점차 둔해진다. 하지만 순희는 오늘.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 상대방을 부끄럽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끄러워서 가명을 쓰긴 했으나, 사실 이것은 지난봄에 쓴 나의 이야기...



이미지 출차: freepik(작가 8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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