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 속 고수 발견
여행으로 숨기_가오슝 편
에피소드 #2. 웰컴 티로 밀크티 한 잔
항구 숙소를 잡은 큰 이유는 없다.
공항에서 찾아가기에 멀지 않고 홈페이지 사진을 보니
6인실 도미토리였는데 깔끔하고
(물론 신축일 때 찍은 사진이겠지만!)
내 예산을 들여다봐 준 것만큼 가격도 알맞아서였다.
비밀스럽도록 둔탁해 보이는 큰 나무문을 힘껏 옆으로 미니,
안에는 여타 호텔 로비와는 다른 카페 크기의 자그마한 카운터와 맞은편으로 소파가 두어 개가 놓인 로비가 있었다.
놀라운 건,
나를 보자 “어서 오십시오.”라는 분명하고 또박또박한 한국어 인사가 있었다는 점이다.
오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니고 딱 한국인 얼굴로 보였다니 다행이군.
속으로 거듭 감탄만 나오는 유창한 한국어 실력의 그 직원 덕에 능숙하게 체크인을 했고,
지도를 꺼내 한국인이라면 마땅히 좋아할 장소를 추천해 주었다.
알고 보니 한 여행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숙소라고 한다.
프로그램을 아느냐고 호기심 어린 눈과 여전히 분명한 발음으로 묻는데
이 사실을 미처 모르고 선택한 나는 어색하게
(아)녜(요) 녜 흐릿하게 대답했다.
직원이 지도로 알려준 밀크티 가게가 도보 거리에 3개쯤 됐는데 그중에서 프로그램에 나온 가게를 별 표시까지 해 주었다.
나름 도피 여행이라는 희한한 이유를 대며 별 표시 대신 오래됐다는 가게로 첫 목표를 정했다.
나의 두근두근 첫 대만 밀크티!
일본 편의점에서 먹어본 게 아마 처음 같기는 한데 원조 나라의 가게는 다르니까!
그나저나 밀크티의 원조가 맞는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참에 맛있으면 오늘부터 원조!라는 또 희한한 이유를 생각해 내며 밀크티 가게로 향했다.
과연 지도는 꽤 유용하게도 구글맵 없이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따로 멀리서부터 밀크티 향기랄까 티가 난 건 아니었고 도착해보니 아주 작은 매장이었다.
간판 위치에 주르륵 한자어 메뉴가 있고, 매대 앞에는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있는 소박한 풍경.
난 이때까지도 유심을 한 여행자가 아니어서
(그러니 지금은 와이파이도 안 된다!)
그저 앞사람이 뭘 건네받나 구경하고 혹시 나를 기다릴세라 뒤를 수시로 돌아보면서
나중에 온 손님에게 먼저 하세요~ 손짓을 보냈다.
당연히 메뉴를 손으로 가리키는 현지인은 없었고 모두 간단한 대화로 주문을 했다.
더 지체할까 봐 직원에게 메뉴판 맨 위에 있는 걸 가리키며 원 밀크티 플리스, 주문했다.
주문을 끝내고 가오슝에서의 첫 매장 계산이니 지폐를 냈고
남은 동전을 동전 지갑에 놓고 있.었.는.데!
내 눈앞에 짤랑~컵이 움직인 게 보인다.
고개를 들어보니 고대하던 내 첫 밀크티가 벌써 준비된 거였다.
아직 동전 지갑을 다 닫지도 못한 사이에 고수는 이미 준비를 끝낸 거였다.
훗, 하는 짧은 웃음을 보이며 매대에 내려놓고는 다시 새로운 주문을 만드는데
정신을 차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가히 고수 맞다!
길게 쌓인 컵을 쏘옥 뽑고 쫀득한 버블을 국자로 푸욱 담고
미리 우려 둔 밀크티가 가득 든 통에서 슈욱 슈욱(아아 이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소리를 내며 음료를 컵에 넘치듯 담고 늘 가까이 있는 수건으로 한 번 싸악 닦아내면 끝.
이게 불과 내가 동전을 받고 지갑에 넣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매일 여러 잔의 밀크티만을 만들어 내느라 가능한 속도가 아닐까?
나야 요즘 동전을 쓰는 일이 거의 없어서
여행할 때만 쓰는 지갑에서 빼고 넣는 그 어색한 행동이 고수와의 속도 차이를 낸 걸 테지.
뭐든 열심히까지는 아니라도 꾸준히 해내는 사람의 모습은 티비 속 달인은 아니어도 각자의 고수겠지.
나도 슬렁슬렁 다니고 여행기 쓰기를 종종 까먹기도 하곤 하지만 여행으로 숨는 걸 꾸준히 해내다 보면
작은 고수 라인에 끼워주려나?
이걸로 벌써 가오슝이 마음에 들었다.
내 마음속 고수가 만들어 준 시원 담백한 밀크티로 심상치 않은 낮 온도를 버틸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