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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주현 Jun 03. 2023

신호등 집착과 자율



풍자가 라디오스타에서 자기가 불의를 보면 잘 못참는 성격이라고 했다. 엠씨들이 어떤 예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가 참지 못하는 불의로 신호등 지키지 않는 행동을 꼽았다. 


가수 박정현이 나온 피식쇼에서는 엠씨들이 전형적인 모범생처럼 보이는 박정현은 나쁜짓을 전혀 하지 않을 것 같다며 혹시 그런 게 있냐고 물었다. 박정현이 주저하자 예를 들어줬다. 신호등을 지키지 않거나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지 않은 적이 있냐고.




코메디 예능이라지만, 한국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의와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나쁜짓이 고작 신호등이나 쓰레기 처리 지침을 어기는 행동인 것 같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럽다. 한국이 너무 살기 좋은 곳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한국인 의식이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아이 수준에 맞춰져 있는 것인지. 


어쨌든 규칙(법)에 대한 신봉이 대단한 것만은 확실하다. 아마도 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인 탓일 것이다.




풍자와 피식멤버가 꼽은 참을 수 없는 불의이며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나쁜 짓을 미국 같은 곳, 특히 뉴요커는 부지기수로 저지른다. 샌프란시코에서도, 월스트리스에서도 운전자와 보행자는 횡단보도 신호에 얽매이지 않는다. 보행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건너도 되겠다 싶으면 빨간불이든 파란불이든 게의치 않고 길을 건넌다. 차량이 많다 싶을 때만 신호를 기다린다. 운전자도 보행자가 없으면 빨간불을 게의치 않고 지나간다. 혼잡한 곳일수록 더 그렇다. 


쓰레기는 어떤가? 미국은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게 분리수거를 전혀 요구하지 않고 심지어 뉴욕에서는 보행자의 작은 쓰레기 정도는 길바닥에 내던지는 일이 일상이다. 한국인이나 일본 여행객만 길에 쓰레기 버리는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기 가방에 우겨 넣는다. 


불의가 난무하는 미국은 공중도덕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정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자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교통 안전 문제가 심각하지도 않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수준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보행자가 신호등 지시를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건 아마 그것이 질서를, 그로 인한 안전을 담보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질서와 안전은 신호등 같은 지시가 있어야만 보장된다는 믿음이다. 


실제로 질서는 아무런 지시가 없어도 인간이 모여사는 곳에서는 언제나 형성된다. 베트남 같은 동남아 시내에는 신호등이 없다. 그래도 차는 지나가고 사람들도 길을 건너 다닌다. 


한국인은 그런 광경을 무질서와 위험으로 난감해하기만 할 뿐 실제로 그런 시스템이 유지되는 이유, 즉 그 안에 질서가 있고 큰 사고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 




사실은 신호등 신봉이 더 위험하다. 베트남 시내처럼 신호등이 없는 곳에서는 차가 빨리 달리지 못한다. 혼잡한 이유도 있지만, 사람들이 건너기도 하는 곳에서는 운전자가 주변 모두를 신경 쓰며 주의하기 때문이다. 보행자 역시 핸드폰을 보면서 걷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 


신호등은 운전자나 보행자로 하여금 주변을 살필 이유를 제거한다. 신호가 모든 것을 지시하며 안전의 책임을 맡기 때문이다. 신호가 점멸거리기 시작하면 액셀레이터를 더 힘껏 밟을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신호를 지키되 주변을 살피라는 요구도 지켜지기 어렵다. 인간의 주의가 신호를 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저 멀리 사방 어디에도 차가 보이지 않는데 빨간불이라고 해서 멀뚱히 신호만 바라보면서 서 있고, 자기가 그렇게 신호를 기다렸으니 혹여 신호를 지키지 않고 밀고 들어오는 차를 보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신호등을 불의의 척도로 삼는다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무지성 때문 아닐까?




신호등은 법과 같다. 신호등 지시에 대한 집착은 무슨 일이든 문제와 갈등이 생기면 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법과 일상의 규칙이 무엇을 위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질서란 원래 지시 없이 사람 사이 부대끼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란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어, 법과 규칙의 첫째 목적이 질서와 안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신호등과 같은 지시에만 질서와 안전을 의존하는 곳이 오히려 무질서하고 위험한 사회다. 신호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율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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