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이황이 왜 들어가야하는지?
안동 지역 여행을 좋아합니다. 병산서원부터 하회마을까지의 코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이 낳은 위인 이황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지역 여행할 때 "밤 퇴계와 낮 퇴계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내로남불의 상징 같은 이이기 때문이죠.
최근 재미있게 읽은 "리스타트 한국사 도감"에는 이황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사관은 이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죠(책 262쪽)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이 일찍 성취되었고... 오로지 성리학에 전념하다 "주자전서"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빈약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을 좋아했으며 이재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년 12월 1일
여기까지 보면 이황이 재산을 모으는 데 관심이 없는 학문하는 이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실제는 전혀 딴판이었다고 합니다. 이황 가문의 분재기, 즉 자녀에 대한 상속 문서를 보면 그의 삶의 다른 면이 밝혀집니다. 이황의 아들이 남긴 분재기(1586년에 작성되어, 이황 사후 16년 뒤)를 보면 아래와 같은 어마어마한 재산이 드러납니다.
토지부터 보면 두락이라는 단위가 나타나는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안동지역에서 밭 1두락은 119.2평 논 1두락은 105.8평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황이 남긴 땅은 36만 3천 평 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황의 재산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산은 토지이지만, 그 토지를 경작할 노비도 중요합니다. 이황의 손자와 손녀가 나눠가진 노비는 367명이라고 합니다(남자 203명, 여자 164명). 당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지방 지주의 재산은 평균 300~500두락, 노비 100여명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황이 얼마나 큰 재산을 일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황은 아버지가 '실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일찍 사망한 데다, 외갓집도 부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재산을 모았을까요?
그 답은 두 번의 성공적인 결혼, 그리고 다음 대목에 나타난 노비 불리기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노비는 양인과 결혼시켜라. (267쪽)
황무지를 일굴 노동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던 시기, 노비를 불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임을 잘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천즉천' 제도, 즉 부모 중 한 명만 천민이면 자녀도 천민으로 살아야 하는 조선의 제도도 이황의 재산 불리기에 기여했다고 합니다.
여자 노비 범금과 범운 등을 벌러다가 믿을 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자를 골라 시집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268쪽)
참 꼼꼼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노비가 105명이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인구의 30~40%까지 노비가 차지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죠.
그럼 노비는 어느 정도의 재산 가치를 가지고 있을까요? 이황이 죽고 10년이 지난 1593년 28세 여성 노비의 가격은 목면 25필이었습니다. 20~30대 남자 노비의 가격은 소 한 마리에 목면을 더 얹어주어야 했다고 합니다.
훌륭한 분입니다. 겉으로 성리학의 거두로 살면서, 이렇게 알뜰하게 재산을 불리고 또 조정의 조세기반을 거덜냈으니까 말입니다. 노비에게 세금을 걷지 못하니, 세금의 부담은 양인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바와 같습니다. 결국 양인들이 높은 세금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양반에게 몸을 의탁함으로써 노비로 신분이 떨어지는 일도 허다했고 말입니다.
암튼, 이황 말고 다른 시대의 위인을 지폐 주인공으로 모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님까지는 이해합니다만, 이이 일가와 이황은 이제 달라진 시대상(과 역사 연구의 성과)를 반영하여 조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