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불하로 산업자본 형성되며, 면방직공업 중심으로 발전
한국경제는 언제부터 근대적인 성장을 달성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60년대부터 가파른 성장을 기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1950년대에도 강력한 성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뭄으로 농림어업 성장이 주춤할 때에도 한국 제조업은 굳건한 성장세를 보임으로써 GDP의 증가를 견인합니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지속적으로 '환율 저평가'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어떻게 제조업의 성장의 가능했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혹시 지난번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의 장기통계: 국민계정 1911-2010, 한국은행 경제통계정보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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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유력한 추론은 “전후 복구 과정에서 성장률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에서 끝내 일어서지 못한 나라들도 세상에는 대단히 많습니다("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114~115 쪽).
이 견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먼저 전쟁으로 인한 파괴로부터의 복구를 당연한 것처럼 전제한다.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한국 경제는 1953년 휴전 이후 복구를 하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을 수도 있으며, 복구는 훨씬 이후에야 혹은 훨씬 느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당시 한국의 낮은 소득 수준을 고려한다면,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한국경제를 ‘가난의 덪’에 가둬 돌이킬 수 없는 침체로 끌고 갈 가능성도 존재하였다.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시기의 높은 성장을 당연시 하는 것은 당시의 경제현황을 적절하게 평가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특히 제조업은 설비가 대단히 중요한데, 전쟁으로 설비 대부분이 파괴되었음을 감안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116 쪽).
1954년부터 1960년까지의 기간 동안에도 제조업 생산은 47에서 100으로 증가하고 있었다(1960=100). 이는 1960년대 전반의 생산 증가와 거의 맞는 수준이다. 즉, 두 기간 동안의 연 평균 성장률을 계산해보면, 1955~1960년까지 13.6%, 1961~1965년까지는 12.3%로 1950년대 후반의 산업생산 증가율이 1960년대 전반보다 더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의 ‘표 4-3’에 잘 나타난 것처럼, 한국 수출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방직 산업은 1955~1960년 사이에 10.9%의 놀라운 연평균성장을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의 수출 주도 경제성장의 발판은 이미 1950년대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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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아마 적산불하 및 농지개혁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R의 공포가 온다", 81쪽).
해방 당시 일본인들이 남긴 재산, 즉 귀속재산(Vested Property)또는 적산(Enemy Property)의 규모는 대략 농지는 남한 전체 농지의 12.3%(논 16.7%, 밭 6.5%), 기업체는 고용노동자의 수나 생산액비중을 기준으로 볼 때 대개 전체의 1/3~1/2 수준이었다. 이런 귀속기업체를 민간에게 불하하는 법(귀속재산처리법)이 1949년 12월제정되었지만 한국전쟁 이전에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생산을 활성화하여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귀속 기업체에 대한 불하를 서둘렀고, 그 결과 1953년까지 전체 귀속기업체 불하 건수의 약 43%가 매각되었다.
이후 1954년 시작된 귀속재산 불하사업은 1958년 5월까지 총26만 3,774건으로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 당시 귀속재산이 우리 경제에 차지하는 규모가 워낙 막대하기도 했지만, 특히귀속사업체는 생산시설이 좋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귀속농지도 토질이 비옥하고 생산성 높은 논의 비중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당시 한국 경제는 귀속재산에 의해 주도되다시피 했다.
어마어마한 자산이었음을 알 수있습니다. 그리고 이 알짜자산은 매우 헐값에 매각되었다고 합니다("R의 공포가 온다", 82쪽).
당시 귀속기업체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민간에 불하되었다. 우선 불하 가격이 저렴했고 불하 대금도 고율의 인플레이션하에서 15년 분할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 대금마저도 은행의 특혜 융자를 받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많은 자본가들이 불하에 참여하기 위해 애썼고 그 과정에서 정경유착을 통한 이익추구와 부패가 발생했다.
강력한 인플레가 발생하는 중인데 15년 분할 상환되었으니, 얼마나 헐값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산업자본이 출현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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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면방직산업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127 쪽).
면방직 산업은 종전 이후 빠르게 생산은 늘렸다. 1954년에는 이미 전쟁 전 수준을 회복했으며, 1958년에는 전쟁 전 수준의 2배가 넘는 제품을 생산하였다. 이러한 빠른 생산증가로 인해 1955년에 접어들면 이미 ‘과잉생산’의 조짐마저 나타났다.
아마 일제시대 때 기술을 습득했던 이들이 생산에 참여한 데다, 토지개혁 이후의 생산성 개선으로 의류에 대한 소비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 면방직산업은 환율 저평가는 물론, 미국의 수출 비협조로 고통 받았습니다("한국 경제사의 재해석", 128 쪽).
면방직 생산자들은 (공급과잉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수출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한국은행은 1957년 10월 ‘조사통계월보’에서 “해외 수출이 현저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출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수출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공급된 원면으로 생산된 제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매우 제한된 수준으로만 허용하였다. (중략) 수출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에 접어들어 미국이 수출에 동의를 하면서부터였다. 이후 면방직 제품의 수출은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60년대 초반 한국 정부가 단행했던 여러 경제정책 덕분에 면방직 공업의 전성시대가 열리기는 했지만, 발전의 토대는 이미 50년대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승만 정부가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많은 부패 사건을 일으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공에 대해서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즐거운 독서, 행복한 인생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