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카데미아, 다비드를 만나다

대리석에 깃든 완벽의 순간

by 트릴로그 trilogue


아카데미아 미술관 예약시간까지 20분 정도 여유가 있어, 근처에 있는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 계획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고아원인이라는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무죄한 아이들의 병원’이라는 뜻)와 산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 방문도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이 고아원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조합이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운영한 곳이라고 한다. 그 의미만으로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래도 이곳까지 온 김에 이 광장에서 잠시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중정을 잠시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균형미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고아원 옆 5층에 위치한 카페(Caffè del Verone)가 여행 유튜브에 소개되어 한번 가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패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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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피렌체.jpg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


피렌체에서 맞이한 첫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상이었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미리 예약해 둔 덕분에 긴 줄을 따로 설 필요 없이 큐알코드만 찍고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표를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긴 줄을 통과하면서 왠지 모를 통쾌감이 살짝 지나갔다. 미술관 안은 이미 많은 관람객들로 붐볐지만, 인파를 요리조리 피해 곧장 〈다비드〉상이 보이는 중앙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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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나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던 〈다비드〉상이었지만, 실물로 마주하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고, 그 웅장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인체 비례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애초에 〈다비드〉상은 피렌체 대성당 동쪽 끝의 지붕선을 따라 배치될 일련의 예언자 동상 중 하나로 계획되었다. 다시 말헤, 높은 곳에 세워져 사람들이 감상하도록 설계된 작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더욱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 다비드를 통해, 피렌체 시민들이 압제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다비드〉상.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맡기기 전, 이 대리석은 여러 조각가들이 시도했다가 실패하며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미 초벌 작업이 진행된 상태였기에,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는 전통적 구도를 만들기에는 대리석의 크기가 부족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그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쏠 준비를 하고 있는 긴장감 넘치는 순간을 포착했고, 밤낮없이 작업에 매진한 끝에 마침내 높이 5m, 무게 6톤이 넘는 거대한 〈다비드〉상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조각상을 성당의 높은 곳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이처럼 장엄한 걸작을 성당의 부벽 같은 곳에 배치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한 피렌체 당국은, 〈다비드〉상을 베키오궁 앞 시뇨리아 광장에서 공개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훼손의 위험이 커지자 조각상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시뇨리아 광장에는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다비드〉상은 한쪽 다리발에 무게를 싣고 서 있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자세를 취하며, 골리앗을 공격하려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조각상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왼팔을 굽혀서 왼쪽 어깨에 걸친 투석기를 잡고 있다. 엉덩이와 어깨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해 있으며, 신체는 자연스러운 S자 모양의 곡선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 자세는 실제로 유지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포즈라고 한다.


아래로 내려뜨린 오른팔의 직선과 왼쪽 다리의 돋움 자세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더한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곧은 코와 적을 응시하는 눈빛, 두꺼운 목과 돌출된 목의 근육, 그리고 몸통에서 무한한 힘이 솟아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골리앗을 노려보느라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고, 목의 핏줄과 앙다문 입술에서는 이 용기 있는 청년의 도전정신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야말로 대가의 걸작이다. 흔히 바티칸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와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함께 미켈란젤로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다비드〉. 오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그 대미를 장식한 셈이었다.


나는 〈다비드〉상을 사방에서 살펴보며 위대한 예술가의 혼과 정신을 느끼기 위해 시간을 들여 감상했다. 사진도 다른 사람들이 가급적 간섭하지 않게 찍느라고 신경을 썼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조각상을 에워싸고 있어 쉽지 않았다.


그 외에도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품과 라파엘로 등의 회화 작품도 둘러보았지만, 결국 나머지 작품들은 〈다비드〉상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image.png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품


또 하나 눈에 띄는 조각작품은 프랑스 조각가 장 드 볼로뉴, 이탈리아식 이름으로는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의 납치”. 이 조각은 한 바퀴를 돌면서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는 진정한 삼차원 작품이었다. 자손을 낳기 위해 여성이 필요했던 로마인들이 사비니 부족의 여인을 납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사비니 부족의 남자는 로마인에게 납치되는 여인을 구할 힘이 없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조각 주위를 돌며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아케데미아미술관에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29피렌체.jpg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의 납치”


이제 피렌체에서의 첫 저녁 식사를 위해 트라토리아 자자로 향했다. 원래 예약 시간은 8시 반이었지만, 일행들이 배가 고프다며 일찍 식사하길 원했다. 결국 7시쯤 식당으로 가서 알아보기로 했다. 식당 앞에는 이미 예약하지 않고 온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선 상태였다.


131피렌체.png 트라토리아 자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식당 매니저에게 문의해 보았더니, 다행히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카운터 바로 앞자리라 쾌적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기다릴 상황이 아니어서 기꺼이 수락했다. 원래 예약시간보다 훨씬 일찍, 그것도 8명이나 되는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더욱 행운처럼 느껴졌다. 이곳은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인기 맛집으로, 평점이 높고 가성비도 훌륭한 피렌체의 대표 식당 중 하나다. 이제 드디어 피렌체식 스테이크,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를 처음으로 경험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음식 사학자들은 비스테카 알라 피오렌티나가 토스카나의 전통 음식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는 18세기 피렌체를 찾은 영국, 독일, 북유럽 관광객들의 수요에 의해 탄생한 요리라고 한다. 비스테카라는 단어가 영어 비프스테이크(beef steak)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많다. 1800년대 초, 피렌체 지역을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이 축제 기간에 대량의 소고기를 모닥불에 구워 군중들에게 나눠 주었을 때, 외국인들이 “More beef steak!”를 외친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피렌체에서 티본스테이크를 주문하는 것은 마치 국룰처럼 여겨진다. 1.3kg에 70유로 정도이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환상적인 가격이었다. 우리는 스테이크 두 개를 주문하고, 이 식당의 대표 메뉴라는 랍스터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토스카나 와인을 추천받아 주문했다.


특히 스테이크는 조리 전에 종업원이 직접 들고 와서 보여 주었는데, 그 비주얼이 압도적이었다. 약 15분이 지나자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피렌체 첫날을 자축하며 건배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비스테카를 해체할 차례. 레어 상태가 어떨지 궁금했지만, 한입 맛보자 너무나도 환상적인 맛에 모두 탄성을 터뜨렸다. 스테이크의 완벽한 맛에 “이제부터는 무조건 레어”라고 외칠 뻔했다. 현지 와인과 함께한 피렌체에서의 첫 식사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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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배를 든든히 채운 후, 천천히 가죽시장 골목을 구경하며 숙소 부근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젤라토 맛집(Venchi Cioccolato e Gelato)에서 디저트를 먹기로 했다. 숙소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이 젤라토리아는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 줄이 꽤 길었지만, 금방 줄어들어 우리는 각자 취향에 맞게 젤라토를 주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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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피렌체.jpg 젤라토 맛집(Venchi Cioccolato e Gelato)


우리 부부는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선택했는데, 상당히 고급진 맛과 감각적인 인테리어 덕분에 기분까지 좋아졌다. 잠시 더 거리 분위기를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일부 커플들은 두오모 광장에서 늦게까지 버스킹을 즐기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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