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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다 Jul 31. 2024

외국인이 파주에 가면 재미있을까?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파주에 가면 재미있을까? 재밌을 것 같다. 거기엔 출판도시만 있는 게 아니라 멋진 건축물, 재미있는 전시나 예쁜 카페도 많고, 경치도 근사하니까. 서울에서 많이 멀지 않으면서 근교의 느낌도 확실하다.아울렛도 있다. 하지만 파주에서 예를 들어 ‘지혜의 숲’만 찾아간다면? (다시 말하지만, 한국어를 읽을 줄 모르는 외국인이라는 가정이다.) 그 공간 자체를 즐기며 충분히 만족할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즐거웠으면서도 서울 여행을 계획하는 다른 친구에게 꼭 가보라며 추천하기는 어려울지도. 도쿄여행 둘째날 나의 오전 일정이 그런 식이었다.


숙소는 침대도 편하고 조용해서 잘 자고 일어났다. 숙소에서 주는 조식 세트로 아침을 해결한다.

요금에 포함되어 있고, 여러 가지 비슷한 옵션 중에 선택할 수 있다. 토스트 대신 크로와상이라거나, 햄치즈 대신 삶은 계란이라거나.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한 끼라도 더 현지를 즐기고자 굳이 나가서 먹었을지 모르겠는데 이제 편해서 대단한 호텔 조식 뷔페가 아닌데도 반갑다. 나이 들었네 나 ㅎㅎ (그러고보니 본토의 낫또가 궁금했었는데 이러다가 결국 낫또는 못 먹고 왔다.)


내가 오늘 오전의 행선지로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은 도코로자와라는 도쿄 근교의 사쿠라타운. 벚꽃이 많이 피는 곳인 건가? 사쿠라의 어감 때문에 이름이 좀 무성의하게 느껴지는데 그곳에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한 카도카와 무사시노 문화 박물관이 있다. 각종 책 전시와 함께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공간이 있다고 한다. 숙소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린다.


여기서 잠깐, 참고로 트립 어드바이저의 도쿄 추천 관광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메이지 신궁

- 도쿄 국립 박물관

- 도쿄 스카이트리

- 도쿄 타워

- 도쿄역

- 모리 미술관

- 네즈 미술관

- 센소지

- 고쿄 히가시교엔

- 우에노 공원


어떻게 봐도 도코로자와 뭐시기는.. 일단 첫 페이지에는 확실히 안 나온다. 그런데 도쿄 시내도 제대로 안 다녀본 사람이 굳이 왜 거길 가나 싶은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왠지 그냥 신사, 미술관, 황궁, 박물관 …전부 썩 내키지 않았다. 전망대나 유명 관광지도, 음.. 뭐.. 좋겠지. 멋있겠지.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어디 한 군데 꽂히지를 않았다.


그냥 이렇게 가게 된 거다:

도쿄에 볼 거 없으면(?) 어디 가지? 차라리 근교에 가볼까? --> 온천이나 기차여행? 가와쿠치코, 가마쿠라? 막상 가보면 그 정도는 아닐 거 같은데. 게다가 혼자 다니면 약간 뻘쭘할 듯한 분위기?

북쪽 근교에 무민밸리가 있네? 나 무민 좋아하는데 여기 갈까. --> 무민밸리 가려면 세이부 패스가 좋다고? 패스 사면 한 번 타면 아까운데 또 갈 데 없나? --> 사쿠라타운? 네즈 미술관을 지었다는 쿠마 켄고? 문화 박물관? 오, 책 전시! --> 책 좋아 --> 그럼 무민밸리 갔다가 오는 길에 저기 가볼까?

근데 생각해보니까 무민이 일본 캐릭터가 아니니까 일본에선 안 갈래.. 그리고 왠지 여기도 혼자서 가기는 좀 ㅎㅎ --> 그럼 도코로자와만 가지 뭐.


이렇게 자아들 간의 무성의하고 심드렁한 회의를 거쳐서 도쿄 시내에서는 영 들어오지 않던 마음의 불이 그나마 도코로자와까지 갔을 때 조금 반짝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어 못한다고 하지 않았냐고요? 네, 못합니다. 하지만 나는 독서량이 많지는 않아도 서점 자체를 좋아하는 인간이라, 디테일의 나라인 일본에서 책 박물관이라고 만들어 둔 곳은 어떨지 조금 궁금했다. 그리고 냅다 근교에 간다는 엉망인 접근에 조금 혹했다. 나도 모르겠다. 게다가 건물 자체에 건축예술로서의 가치가 있기도 하고. 웬만해선 일행이 있을 때 여기까지 찾아오기는 쉽지 않겠다는 판단도 한 몫 했다. 뭐, 가 봅시다.



낯설고 친근한 세상, 읽을 수 없는 책들의 세계


조식을 먹고 약 한 시간 반 동안 긴자선과 게이힌토호쿠선(JK), 무사시노선(JM)을 갈아타고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찾아간다. 알파벳과 숫자에 의존하여 구글맵이 추천하는 경로를 따라간다.


도쿄 밖으로 나가는 방향이라 그런지 주말인데도 사람이 없어서 편히 앉아서 갔다. 맞은편 끝자리가 비자 가운데에 앉아있던 사람이 슬며시 끝자리로 당겨앉는 걸 보고 속으로 우리나라랑 똑같군, 싶어서 웃었다. (그 사람이 한국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풍경이 점점 한적하게 변해간다.



도코로자와 역 도착!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역 맞은편에 모스버거가 있다. 근교에 나오니 순식간에 시골 분위기가 되었다. 힘내서 10분쯤 걸어가 본다.


어느새 사진으로 보던 건물이 눈 앞에 성큼 다가와 있다.

건물 외관은 이런 느낌. 웅장하다. 압도하는 힘이 있다. 각도를 달리하는 여러 면을 만들어서 어디서나 이 건물을 의식하게 된다.


바로 옆에 모던한 느낌으로 지은 신사가 있어서 구경해 본다. 날씨가 화창해 산뜻한 풍경이 되었다.


소원을 비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잠시 둘러보고 곧 박물관으로 향한다. 저 앞에 물로 되어 있는 곳은 가까이 가보니 아이들이 제법 본격적으로 물놀이를 즐기고 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무릎 혹은 그 위까지 오는 깊이다. 제복을 입은 관리인도 있었다.

나도 발이라도 담그고 싶지만 수건도 없고, 무엇보다 아이를 동행하지 않은 성인이 혼자 등장하면 매우 이상해 보일 것 같다. 관심 없는 척 안으로 들어간다.



로비에는 어쩐지 라쇼몽에 나오는 집의 모형을 전시해 두었다. 설명판에 구글 번역기를 들이대 보았지만 왜 여기 이것이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뒷배경으로 글자가 비처럼 내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연출했다. 사진에는 글씨가 그냥 인쇄된 것처럼 나와서 그 비 내리는 연출을 담을 수 없는 게 아쉽다.

표를 끊고 안에 들어오니 저런 표가 맞이한다. ‘말’을 품고 있는 다양한 개념들.


그리고 더 깊숙히 들어가니 온갖 크고 작은 책이 신기한 모양의 책장에 꽂히고, 얹히고, 튀어나와 있었다. 이 책장도 쿠마 켄고가 설계했다는 것 같다(아마도). 전시설명용 앱이 있어서 그걸 설치해서 보면서 다녔다.



책장의 모양에 대해서까지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아주 획기적인 모양을 만든 것도 아니면서, 아기자기하게 책이 들어찬 것을 잘 감상할 수 있게 해두었다. 책장마다 앞에 의자를 두어 실제로 저기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게 했다. 나도 영어로 된 데츠카 오사무의 명작 '블랙잭'(예전에 애니메이션에서 성우가 ‘브라크 자크’라고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ㅎㅎ)을 발견해서 한동안 읽다 왔다.


한편 8m의 거대 책장이 있다, 코엑스 별마당을 확대해 놓은 느낌이다 라는 말에 혹해서 와봤는데 '별마당 확대'는 내가 잘못 읽은 건지 멋대로 머릿속에서 반대로 기억한 건지 절대 그건 아니었다. 다만 이 거대 책장은 '책장극장'이기도 해서 여기서 프로젝터를 이용한 일종의 짧은 공연을 하는데, 이걸 보러 일부러 이 박물관에 올 것은 아니지만 온 김에 볼 만은 했다. 지금은 이렇게 평을 짜게 했지만 그 시간, 그 공간에서는 제법 몰입해서 보게 되었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의 실루엣을 잘 살린 연출이었다. 사람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하는. 나에게 책은 세상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수없이 많은 세상이 지금 이 한 공간에 모여서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

한국어도 보인다.


전시는 전체적으로 오래된 서가에 온 느낌이었다. 조잡한 옛날식 표지나 편집을 보면서 새삼 요즘의 책 디자인이 얼마나 발전했는가 생각도 해 보고. 여기 있는 책 안에 담긴 지식은 상당량이 이미 옛날의 뒤처진 것이겠지만 그 옛날에는 이런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얼마나 귀했을까, 마땅히 놀 거리도 없는데 지금 보면 하찮은 오락용 책이라도 그 때는 누군가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었겠지,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런 한편으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세대를 아울러 공감을 지닌 힘 있는 문장들도 이 안에 가득하겠지.


The Philosophy of Frog and Toad라는 그림책은, 정말 별 내용이 없어 보이는데 어쩐지 계속 보게 되는 힘이 있었다. 딱히 줄거리가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작은 삽화에 한두 문장 곁들인 책인데도. 이거 분명 한국어로도 번역되었을 것 같다 싶어서 돌아와서 찾아보니 과연 '개구리와 두꺼비' 시리즈로 유명하다고 하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것 같기도 하다. (작가: 아놀드 로벨)


그 외 알 수 없는 구석 공간에서는 인체 모형 같은 것을 전시해 두기도 하고 아라마타 히로시(유명한 도쿄 출생 작가인 것 같지만 나는 처음 알았다. 이 박물관에 개인의 장서를 기증했다고 한다)의 얼굴을 거대하게 홀로그램으로 매달아 놓기도 하고 좀 난해했다. 나름대로 설명을 덧붙여 두었지만 잘 와닿지 않아 빠르게 넘어간다.


실컷 구경을 하고 나니 카페와 기념품 샵에 가고 싶다. 모든 박물관 구경의 피날레 아니겠어?


카페에서는 따뜻한 커피와 고구마 몽블랑(괜시리 '홋또 코히'라고 주문해 봤다. 그러나 고구마 몽블랑에서 바로 “에또, ..고레..” ㅎㅎ)을 주문했다. 저 고구마볼이 아래에도 몇 개 더 들어 있는데 쫄깃하고 맛있다. 창밖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쉬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몽블랑을 먹는다.


굿즈도 구경할 것이 많았다. 퀄리티는 다양한 편. 상당히 오랜 시간을 거쳐 구경한 뒤 선물로 작은 수건을 샀다. 점원분과 말이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친절하게 선물용 봉투도 따로 넣어주셨다.

히히

과연 일본은 아기자기한 물건이 많아서 한참동안 구경했다.

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아무튼 정말 세밀하다. 어렸을 때 문방구에서 팔던 조립 로봇이나 자동차 같은 걸 종이로 만들어놓았는데 부품의 엄청난 반복성이(가령 해바라기 몇십 그루) 놀랍다. 사진에서 배경에 흐리게 보이는 게 전부 부품이다. 저걸 하나하나 떼어 완성한 게 앞에 있는 작품. 장인의 나라? 디테일의 나라? 사고 장면은 추리소설의 한 장면 같아 재밌다. 오히려 해바라기 꽃밭은 기분 탓인지 가운데 사람이 서 있는 게 좀 으스스해.


이 정도 구경을 하고, 굿즈샵을 나와서도 못 본 곳은 없는지 좀더 구석구석 둘러본 후 이제 오후 일정을 향해 간다. 오후에는 중심지를 적당히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다시 전차를 타고 이제 도쿄 안으로 들어간다.


카도카와 박물관에서는 내가 일본 문화에서 가끔 느끼는 집요함이랄까 그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모습(좋든 나쁘든)에서 나오는 두 가지 측면, 괴기스러움과 세밀함 두 가지를 다 느낀 것 같다. 책구경도 나름대로 만족했던 것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세상으로 가득한 공간에 와 있다는 데서 오는 약간의 설렘이 있었다. 나는 하나도 모르는 이 문자로 누군가는 글을 배우고 학교에 다니고 오랜 세월 연구를 거듭해 책을 써냈구나. 누군가는 길이 남을 훌륭한 고전을 쓰고 누군가는 한 번 읽고 버릴 잡스러운 이야기를 썼다. 누군가는 그걸 읽고 감명을 받아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고 누군가는 시간을 때우다 이내 다른 일로 넘어간다. 내가 익숙한 세계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런 모습들이 결집되어 있는 공간에 와 있다는 것이 생경하면서도 안심되었다.


창밖을 보니 저절로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떠오르는 울창한 나무와 숲이 풍경을 채운다. 굵다는 말로 부족한 거대한 나무. 멋있다. 사람들이 나고 죽어간 길고 긴 세월 동안 나이테를 늘려가며 그 자리를 지켜온 존재감이 있다. 하지만 감탄 외에도 드는 약간의 불편함도 있다. 왜?


오래도록 옛 것을 잘 지켜온 일본의 고풍스러운 전통미나 잘 보존된 자연을 보면 그저 순수하게 감탄하다가도 불현듯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빼앗긴 적 없는 땅에 와 있구나, 하고. 일본이란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내 안에서 정립되지 않아 지금까지 일본에 와보지 못한 것은 아닐지. 이 나라의 문화와 정치/외교, 또는 국민 개개인과 정부 사이의 간극이 주는 혼란은 나 한 사람만 느끼는 건 아닌 듯하다. (게다가 이 글을 올리는 시점에는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유산 등재가 결정되어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가깝고도 먼 나라, 낯설고도 익숙한 곳. 서투른 생각들이 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신주쿠역까지는 아직도 제법 남았다. 전차가 흔들린다.


숙소 - 도코로자와 - 신주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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