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차 패션디자이너의 붓질과 불멍 #1
캠핑의 계절 봄이 왔다. 2023년 어느 토요일 오후, 양평의 한 캠핑장 2번 사이트에서 여유롭게 붓질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2박 3일 일정으로 금요일 체크인을 했다. 캠핑 둘째 날은 이런 여유가 가능하구나. 어제 지어 놓은 텐트집에 힘쓸 일도 없고, 아이들은 방방이와 짚라인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엄마, 아빠를 찾지 않는다.
“이야, 캠핑은 2박 이상 해야 되네. 이게 캠핑이구만”
신랑도 나만큼 좋은가보다. 신경 안 쓴 듯 힘을 준 올블랙룩(All black look. 모든 것을 검은색만으로 한 룩)으로 릴렉스체어에 몸을 맡기고 있다. 사이트 아래의 풍경을 만끽하다가, 평소와 달리 폰을 꺼내 사진을 이리저리 찍더니 톡을 주고받고 있다.
워킹맘 시절에 다니던 주말 1박 2일의 캠핑은 눈코입 다 달아나듯 쉴 새 없었다. 참말로 내돈내산 생고생 그 잡채. 자연을 파고드는 우리 가족에게 꼭 맞는 취미이지만, 체력은 부치고 즐길 틈이 부족했다. SNS 인플루언서의 텐풍 사진들은 찰나를 놓치지 않는 솜씨였을까, 시간을 가진 자의 여유였을까.
‘설마 그림을 그릴 짬이 나겠어?’ 이번 캠핑 출발 전 2박 일정의 짐을 싸면서 주방 도구들 사이에 미니팔레트를 챙기며, 자연 속에서 붓질을 하는 행복한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은 이제 내가 꿈꾸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된 것이다. 오픈채팅방에 자랑을 끝낸 신랑이 나의 분위기에 맞추어 나는 모를 장르의 음악을 나지막이 틀어주었다.
타닥타닥. 캠핑장의 이웃은 타닥 소리와 함께 등장한다. 차바퀴가 파쇄된 자갈 위를 지나며 속도를 줄여가는 익숙한 소리. 3번 양반들이 오셨구나. 성공적인 캠핑을 위해서는 이웃을 잘 만나야 한다는 국룰이 있지. 붓은 손에 들고 있을 뿐, 안 보는 척하며 쓰윽 스캔을 해낸다. 세단이라, 커플인가 보네, 좋다, 조용하겠다. 오늘의 이웃을 확인하고 만족한 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붓에 퍼머넌트로즈색 물감을 묻히며 꽃그림에 여념 없는 모습을 내보였다. 수채화 수업 이번 교재의 마지막 단계인 붉은 천일홍을 그리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중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 숨을 잠시 참으면서 꽃잎 가닥을 켜켜이 덧칠했다.
탕탕탕. 3번 사이트 커플이 알콩달콩 분주하게 텐트 피칭을 하며 팩을 박는다. 그 소리에 슬쩍 눈길을 주었다가 평온하던 가슴이 쫄깃해져 왔다.
이.럴.수.가.
저 티셔츠, 내 디자인이잖아
코로나 시대의 캠핑붐은 패션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었다. 당시 그래픽에 캠핑 테마를 접목하여 판매가 좋았던 시리즈가 있다. 면폴리 혼방으로 신소재를 개발하였는데 시원한 터치감과 구김이 없고 건조기를 사용해도 줄어들지 않아서 인기를 끌었다. 그 아웃도어 시리즈는 시즌마다 이어서 출시를 했는데, 작년에 퇴사할 무렵 23SS시즌으로 컨펌한 캠핑티셔츠를 3번 커플이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남자 이웃은 그레이, 여자 이웃은 화이트 칼라의 티셔츠에 진카키색 아디다스 유틸리티 팬츠(Utility pants. 카고팬츠와 같이 포켓 등의 실용적인 디테일을 가미한 스타일)를 코디한 커플. 내가 디자인할 때 떠올린 캠핑룩을 고스란히 입은 고객님과 이웃으로 마주치다니.
천일홍 그림을 망칠 뻔했다.
붓으로 물들홍 DESIG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