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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Sep 11. 2023

남편은 우리가 가난하다고 했다

매년 해외여행을 가고, 외식을 일삼는 우리가 가난하다니!



경제적 자유 전쟁은 한동안 나의 승리로 기우는 모양새였다. 남편이 조용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혼자 바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외길을 가는 도인처럼 원래도 빨랐던 기상시간을 앞당겨 새벽에 일어났고 매일 반신욕을 하며 책을 읽었다. 여기에 아침운동까지 보태 출근 전 루틴을 완성하고 실천했다. 저녁엔 꾸벅꾸벅 졸면서도 새벽같이 눈을 떠 책을 읽는 남편을 보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남편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마치 너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부자들은 다 이렇게 해"


"어? 부자들이 그렇게 해서 똑같이 따라 한다는 거야?"



지금이야 이름을 날리는 부자들의 생활습관이 곧 그들의 성공비결이었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재테크 책이나 제대로 된 자기계발서 한 권 읽지 않고 오직 소설과 에세이만을 사랑했던 내가 '몰입의 힘'이나 '긍정확언' '미라클모닝'의 기적을 알리 없었다. 



오히려 남편의 말은 내 지난 덕질 생활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한때 나도 야구잠바 사입으면 핑클 되는 줄 알던 시절이 있었지' 싶었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솔직히 좀 웃겼다. 갸륵한 표정 짓는다고 누구나 장원영이 되는 게 아닌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책 읽는 습관을 기르면 다 부자가 되는 건가. 웃음 뒤엔 '정말 애쓴다 애써' 싶은 마음이 따라왔고 그렇게까지 부자가 되고 싶다니 한편으론 짠했다.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며 나는 우리가 가난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난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다. 한편 사전은 '부자'를 재물이 많아 살림이 넉넉한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부자까진 아니었지만 나는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걸로 마음이 괴로웠던 적이 좀처럼 없었다. 그러나 경제공부를 시작한 남편은 뒤늦게 우리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계절마다 해외여행을 하고, 새 차를 구입했으며 스칸디나비아디자인센터에서 북유럽 그릇을 직구하던 시절을 지난 참이었다. 그의 목표는 원대했고, 그에 비해 가지고 있는 돈은 보잘것없었다. 그는 재테크 공부를 하면 할수록 '넉넉하지 못하여 마음이 다소 괴로운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우리는 신혼 때 일억 오천짜리 서울의 빌라 전세를 거쳐 결혼한 지 2년이 되던 해에 2억짜리 경기도의 신축빌라로 내 집마련에 성공했다. 남편의 나이가 서른둘, 내 나이는 겨우 서른이었고 당시 우리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1억을 대출받았다. 이때 우린 가난했던 걸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심심찮게 해외여행을 떠나고 각종 북유럽그릇을 직구로 사들이며 인생에서 가장 풍요로운 소비생활을 했던 때가 이 시기였다.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며 맞벌이를 하던 시절, 나는 새집이고 방세칸과 넓은 거실을 가졌으며 창으로 빨간 벽돌의 수도원 기숙사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그 집을 좋아했다. 남편과 나는 꽤 열심히 살았고, 4년을 좀 넘기면서 1억의 빚을 모두 상환했다. 동시에 망설이지 않는 소비생활도 이어가며 젊고 성실한 우리들의 젊은 날을 그 집에서 차곡차곡 채웠었다. 첫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자라는 기쁨을 온전히 누렸던 시기를 이과남자는 경제적으로 잘못된 선택으로 기억한다. 재테크 서적을 하나 둘 읽던 남편은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을 이해하면서 우리가 온전히 노동을 통해 모았던 1억이, 누군가는 위치 좋은 건물이나 아파트를 소유해 힘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돈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그는 즉시 우리가 살고 있는 빌라를 팔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대단지아파트가 아니어서였을까, 한동안 누구도 집을 보러 오지 않았고 가끔 터무니없이 집값을 후려치는 사람들만이 다녀가며 마음을 할퀴었다. 내 눈엔 결점이 하나도 없던 우리의 골든뷰는 오랫동안 새 주인을 찾지 못했다. 언제 누가 집을 보러 올지 몰라 쓸고 닦으며 지내던 날들이 일 년에 가까워 올 때쯤 드디어 새 주인에게 집을 넘겨줄 수 있었다.  5년 동안 겨우 500만 원 올랐던 경기도의 빌라에서 서른일곱이 되어서야 탈출할 수 있었던 남편은 이사비용까지 합치면 이건 손해나 다름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의 다음 집은 경기도 빌라를 처분한 돈에 1억이 훌쩍 넘는 대출을 얹어 구한 서울의 10년 된 24평 대단지아파트였다. 오래 고민하고 조사한 뒤 남편은 우리가 가진 돈에서 살 수 있는 15년 이내의 아파트는 서울에 딱 세 곳뿐이라고 했다. 그중에서 남편과 나의 직장이 멀지 않고, 아이를 돌봐주셨던 친정 엄마도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겨우 1년에 100만 원씩 오른 셈이었던 빌라와 다르게 산 밑에 있었으며 아주 가파른 언덕을 자랑했고,  지하철역에 가려면 버스를 20분이나 타야 하는 최악의 입지와 인프라 덕에 막달 임산부의 출퇴근을 괴롭게 했던 그 아파트는 놀랍게도 매달 꾸준히 가격이 상승했다. 그 집에 살면서 중간에 둘째를 출산해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었지만 신기하게 우리 총자산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남편은 자신감을 얻고 외치게 된 것이다. 경제적 자유를 10년 안에 얻겠다고!









그쯤 나는 여전히 문과여자의 소비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애쓰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조금씩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남편은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에겐 '경제적 자유'라는 명확한 꿈이 있었고, 그랬기에 공부하며 성장하는 희망적인 모습을 했다. 그것은 귀여운 머그컵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삶의 열정이었다. 



나는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을 크게 그리고 멀리 봤을 때 내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태도는 청소기나 식기세척기를 사들이는 일이 될 수 없었다. 그 사이 둘째 아이가 두 돌을 향해가면서 육아는 조금씩 수월해졌고 생각 끝에 쉬운 경제서들을 읽어나가는 것으로 그의 경제적 자유 선언에 자연스럽게 힘을 보탰다. 



한 가정을 일구고 그 안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도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위한 첫걸음은 같은 목표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는 언제나 가정의 행복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달렸지만, 그건 어느 정도의 가정 경제 수준을 유지해야 하는 세부사항이 잘 지켜질 때 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꽤 잘할 수도 있다는 대책 없는 믿음을 가지고, 손에도 잡히지 않는 경제적 자유를 향해 결국 우리는 마음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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