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더
지금 살고 있는 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전에 살다 나간 사람들도 에어컨이 없었는지 실외기를 설치한 구멍 자국도 없다. 임대인이 에어컨 설치를 못하게 하는 그런 집도 아니다.
올해 2월에 집을 알아볼 때 중형견과 살아야 하는 상황이라 원룸보다는 투룸을 알아보고 있었는데 대체로 투룸은 풀옵션이 없고 모든 가전제품을 다 사야 하는 조건이었다.
유일하게 이 집은 전에 살던 사람이 풀옵션으로 이사를 나간다고 사용하던 세탁기, 작은 아일랜드 식탁,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 당장 필요한 것들을 조건 없이 두고 간다길래 싼 보증금에 시세 대비 저렴한 월세, 계획에 없던 풀옵션까지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어서 계약을 진행했었다.
1983년 10월에 지어진 지금 살고 있는 구옥의 다가구 주택.
창문의 샷시도 83년 것을 그대로 유지해서 정말 유아기 정도 때나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그러니까 너무 오래되어서 소리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소리가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어서 발견한 소리.
아무튼 그 정도로 오래된 나무 창문이 묵직하게 덜덜덜 굴러가며 닫히는 소리가 난다.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서 에어컨 없이 살 수 있을까 겨울부터 고민을 했고 어느덧 여름이 왔다. (사실 나의 여름은 5월부터.) 이미 6월은 반 이상 지났으니 7,8월 + 6월과 비슷할 9월.
두 달 반만 잘 견디면 될 텐데 에어컨을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 땀쟁이의 에어컨 없는 여름 나기라니!
뭐 더우면 찬물로 씻어 몸을 얼리면 되고, 다행인지 다행히 아닌지 집에 해가 쨍쨍하게 들어오는 시간은 공부방은 아침 6시부터 7시 반까지 약 한 시간 반, 침대방은 늦은 오후 아주 잠시 낮은 조도로 들어오는 것 끝이라 집 자체도 그리 더운 편은 아니다!
나름 평범하고 하자가 없는 집에 살았을 때는 여름이면 더위와 폭우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기사를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그런 상황에 있어서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삶을 사는 것 같다.
당장 해결이 안 될 문제는 내 힘으로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당장 앞으로 일어날 일에는 미리 예상하고 대비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글을 쓰면서 결심했다.
'올 해만 견뎌보고 안 되겠으면 내년에는 사자! 미루다가 더워지고 사지 말고 내년 4월에 미리 사자!',
'비가 오면 건물 출입구 나가는 길에 물이 차던데 임대인 사장님한테 말해서 물길을 내자고 하자!',
'해가 지면 센서등이 없어서 집 출입구가 깜깜하니 태양열 센서등을 사서 붙이자!',
'샷시에 틈이 많아 벌레가 자꾸 들어오니 접착 방충망을 사다가 봉쇄하자!'
무언가에 도전할 때는 한 번 더 한 번 더 하다가 한 번 더 안 해도 되는 때가 결국 오고,
끊을 수 없는 것을 끊어야 할 때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한 번만 더를 계속한다.
모든 땀쟁이들이 무사히 여름을 보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