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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May 12. 2024

수영이 좋은 건지, 수영복이 좋은 건지


시작은 체크. 아. 체크 때문이었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체크 패턴 러버이다. 특히 타탄체크는 내 심장을 무조건 후벼 파고 본다. 여느 날처럼 쇼핑몰을 구경하고 있던 때에 어떤 수영복이 눈에 띄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수영복은 온몸을 다 무장하는 래시가드 형태이거나, 혹은 이른바 ‘여성미’를 강조하는 수영복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토록 단순한 수영복 모양에 빨간색 타탄체크라니. 나는 그 수영복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수영과는 거리가 멀던 내가 그 수영복을 구매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수영을 할 줄도 몰랐고, 앞으로 수영을 할 일도 없었고, 호텔 수영장을 간다고 해도 저 수영복을 입을 리 만무했다. 나는 강경 유교걸이었으므로 온몸을 다 감싸는 래시가드를 입거나, 혹은 수영장을 아예 이용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그렇게 아마 반년은 지났을 것이다.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이야기의 주제가 여느 날처럼 이제는 운동을 해야지라고 귀결되던 날이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그 예쁜 수영복이 항상 남아있었으므로 “나 수영하고 싶어. 근데 수영복 사고 싶어서 수영하고 싶어.”라고 말했다. 희한하게도 수영복 사고 싶어서 수영하고 싶다는 비논리에도 이게 무슨 헛소리냐 타박하는 친구가 하나 없었다.

그 후로도 또 반년이 지났다. 아른거리던 그 수영복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다. 그렇게 원하던 수영복이지만 구매하기까지 망설임도 컸다. 수영 초보자가 입기엔 다소 화려한 수영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만든 ‘초급반 다움’이라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초급반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괜히 튈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초급반 다운 모습’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1. 되도록 튀지 않는 수영복을 입고(내가 수영 못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그래서인지 초급반에 가면 어디서 약속이라도 한 듯 온갖 브랜드의 검정 기본 수영복이 다 등장한다.),

2. 수영복을 자주 바꿔 입지 않으며(아직 발차기도 제대로 못하는데 수영복 욕심만 많은 이미지는 안돼),

3. 누군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진 말을 하지 않고(나대면 안 된다) 조용히 있는 것이다.


써놓고 보니 왜 이렇게까지 생각했나 싶지만 하여간에 그 당시엔 그랬다. 그래서 내가 타탄체크, 심지어 빨간색인 수영복을 구매를 망설였던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수영복을 너무너무 입고 싶었다. 수영을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인데 튀고 싶지 않단 이유로 못 입는 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절충안을 내었다. 강습날에는 무난한 검정 수영복을 입고, 자유수영날에 내가 입고 싶은 수영복들을 입는 것이다. 일단 선생님과 같은 반 회원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1차 목표는 달성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자유수영날엔 사람들이 별로 안 온다. 자유수영날쯤은 내가 입고 싶은 수영복을 입어도 될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강습날에는 계절별 교복 수영복을 정해놓고 입는다. 봄에는 벚꽃이 그려진 수영복, 여름엔 바다가 그려진 수영복, 가을엔 아가일 니트 패턴이 그려진 수영복, 겨울엔 타탄체크 수영복을 입는 식이다. 그리고 자유수영날에는 내가 입고 싶은 수영복을 맘껏 입는다. 크리스마스 시즌엔 빨간 수영복과 초록 수모를 조합하고, 핼러윈 시즌엔 마법사 느낌이 나는 남색 바탕에 별이 그려진 수영복, 밸런타인데이엔 하트가 잔뜩 그려진 수영복, 호텔 수영장을 이용할 땐 뒷 판이 발레리나 옷처럼 끈을 늘어뜨려 입는(타이백) 수영복 등등..


이제는 나 스스로를 ‘우리 센터 패셔니스타’로 지칭하곤 한다. (누군가의 공인이 있던 건 아니고 그저 나의 수영복 소비를 합리화하는 방법이다. ^^) 수영복을 자주 바꿔 입는 게 나의 콘셉트이고 나의 의무인 셈이다. 수영인들은 수영복을 종종 ‘물옷’, 일상복을 ‘육지옷’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육지옷 자주 바꿔 입는 만큼 물옷도 마찬가지란 것이다. 나도 매우 동의한다.



어느 자유수영날, 옆레인에서 개인 강습을 하시던 우리 반 강사님과 마주쳤다. 내가 강습날과는 다른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오니 “수영복 사셨어요?”하고 물으셨다. 결국 들켰군. 나는 수경을 후다닥 쓰며 부끄러운 마음을 꽁꽁 싸매며 “수영복이 많아요...” 대답했다.


앞으로도 수영복 구매를 멈출 생각은 없다. 계절 따라 기분 따라 맛 따라 멋 따라 수영복을 바꿔 입는 것이 나의 소소한 행복이고 즐거움이다. 나의 소망은 앞으로 30년은 수영을 하는 것, 그리고 수영하는 할머니들 중에서 제일가는 물옷 패셔니스타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신상 수영복을 찾아 인터넷을 뒤적거린다. 아무도 내 앞길을 막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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