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마지막 의례

-정년을 앞둔 학교 영양사의 마지막 꽃길 걷기

by 홍주빛

봄날, 마지막 의례

-정년을 앞둔 학교 영양사의 마지막 꽃길 걷기



내년에도 벚꽃은 피겠지만,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정년을 앞두고 아이들과 걸은 마지막 꽃길.

따뜻한 밥처럼, 그날의 기억을 꾹꾹 눌러 담아 남깁니다.




벚꽃은 내년에도 피겠지만,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올해의 봄은 조금 더 깊게 다가왔다.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는 농촌형 전원 기숙형 고등학교다.
입시 경쟁에서 벗어난 청소년들이 모여, 사계절의 숨결을 느끼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함께 고민하는 곳이다.

이곳에는 매주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수업 참관, 연구, 교류 등 여러 이유로 학교의 문턱이 닳도록 발길이 이어진다.

학생들은 ‘기숙사’ 대신 ‘생활관’이라 부르는 공간에서 가족처럼 지낸다.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울고, 또 배우며 자라는 곳이다.

나는 그 안에서 아이들의 밥을 책임지는 사람.
매일 식당에서 식판 위에 정성과 마음을 얹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함께한 날들 속엔 계절마다, 날마다 작지만 특별한 의례들이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꽃길 걷기’는, 봄을 맞이하는 우리만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꽃길 걷기는 매년 4월 중순,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날에 열린다.
작년엔 꽃샘추위가 길어져 일정이 조금 늦춰졌지만, 그 또한 다른 맛이 있었다.
올해는 벚꽃이 학사 일정과 딱 맞춰 피어 주었고, 우리는 지난주 금요일, 그 봄길을 함께 걸었다.

이 행사는 생활문화 모둠이 주관한다.
일정을 조율하고, 간식도 조사하고, 걷는 도중의 질서나 속도까지 꼼꼼히 챙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걷게 될 모둠을 짜는 일이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고루 섞고, 선생님들도 배치한다.
나는 ‘수업’보다 ‘식사’로 아이들과 소통해 온 사람이기에, 이런 현장 활동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출발 전엔 출석 확인과 공지사항 전달이 이루어지고, 체조로 몸을 푼다.
체육부 훈남 친구들이 시범을 보이면, 덩실덩실, 키득키득… 웃음이 번진다.
밥을 준비할 때 들리던 웃음소리와 비슷하다.
그 익숙함이 괜히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출발!”

생문부장의 메가폰 소리로 꽃길 걷기가 시작됐다.
모둠 간 간격을 맞추며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일곱 해를 함께 걸었다.
비슷한 길, 그러나 매년 다른 풍경이 있었다.


올여름이면 정년을 맞는다.
그래서일까, 올해는 감동과 정서, 그 모든 감각을 눈과 가슴에 꼭꼭 새기고 싶었다.

그날은 낮 기온이 22도를 넘을 만큼 따뜻했지만, 해가 지고 찬바람이 불자 기온이 훅 떨어졌다.
들판을 지나 산속으로 접어드는 길은 더 쌀쌀했다.
나는 한겨울에나 입는 오리털 롱패딩을 꺼내 입었다.

얇은 봄 티셔츠만 입은 2학년 친구들이 보여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괜찮겠어?”

한 학생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 상남자예요. 괜찮아요!”

그 옆에 있던 여학생이 툭 웃으며 말했다.
“쳇,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마도 그 학생의 걱정이 그렇게 표현된 거겠지.
그 짧은 농담에도 따뜻한 마음이 묻어나 있었다.
아이들과 매 끼니를 나누며, 난 그런 마음들을 자주 봐왔다.


나는 OOO 선생님이 속한 모둠에 함께하게 되었다.
사실 내 이름은 편성표에서 빠져 있었기에, 일부러 함께하자고 말씀드렸다.
올해의 꽃길은 내게 하나의 ‘작별 식사’ 같았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더 깊이 함께하고 싶었다.

우리 모둠 이름은 ‘백합’.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다.
그 모둠엔 2학년 ㅇ군도 있었다.

그는 기타와 북이 합쳐진 듯한 악기, 벤조를 메고 걸었다.
여섯 줄을 손가락으로 퉁기며 걷는 사이사이, 짧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요즘 유행하는 DSLR 카메라를 든 친구들도 있었다.
모두 다른 색깔, 다른 에너지를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 모습들이, 밥알 하나하나처럼 소박하고 정겹게 느껴졌다.

ChatGPT Image 2025년 4월 22일 오후 12_40_09.png 벤조를 메고 있는 학생 이미지

포토존에서는 매년 그 자리에 서서 같은 포즈로 사진을 남긴다.
작은 의례지만, 매년 반복되는 그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하얀 벚꽃 사이로 석양이 번졌다.
붉은 노을은 마치 수채화처럼 풍경을 물들였다.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며, 게임을 하며 걸었다.

약 1시간 40분이 지났을까.
어둠이 내려앉자 도착지의 불빛이 따뜻하게 반겨주었다.
논 위에 조용히 떠 있던 오리 떼가 우리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조용한 경계 속에서 그들도 우리를 바라보았다.


모든 모둠이 도착하면 학년별로 둘러앉아 마지막 친구들을 기다렸다.
이제부터는 ‘학년별 시간’이다.

올해 준비한 간식은 친구들이 원한 대로
따뜻한 가락국수 국물, 밥버거, 그리고 학부모님들이 보내주신 달콤한 딸기였다.

평소에는 조리실 안에서 아이들을 바라봤지만,
이 밤은 나도 그 자리에 앉아 함께 먹었다.

봄밤. 딸기와 밥버거, 그리고 따뜻한 가락국수 국물.
그것을 나누며 우리는 청춘의 열기로 그 밤을 데웠다.


나는 오늘 함께 걸었던 그 길에서
나눴던 대화, 느꼈던 감정, 그리고 받았던 고마움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어
이 글을 남긴다.

안녕, 꽃길 걷기.
안녕, 함께여서 행복했던 그대들이여.
그리고 고맙다.
매일, 밥처럼 따뜻했던 너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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