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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Dec 31. 2020

내가 너무 큰 사람이 되지 않는 것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잠들기 전, 우리는 악어를 만난다. “악어야~” 아이가 악어를 부르면 나는 휴대폰 조명을 천장에 비춰 다른 한 손으로 악어 모양을 만든다. 남편은 아이와의 수면 의식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는데 내가 아이를 재우는 날에는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

네 손가락을 나란히 붙이고 엄지 손가락으로 입 모양을 만들며 아이에게 묻는다. 악어지만 미키마우스 같은 목소리를 내면서.

“날날아, 오늘 즐거운 일 있었어? 악어한테 말해봐.”

아이는 미주알고주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엄마 아니 악어에게 털어놓는다. 즐거웠던 일, 속상했던 일, 칭찬받고 싶은 일도.

자려고 시작한 의식인데 어떤 날은 실컷 수다 떨다 잠이 저만치 달아나기도 한다. 하루는 아이가 악어 아니 내게 물었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엄마 크면 할머니 되잖아. 무슨 일하고 싶어?”

‘엄마는 다 컸잖아’라고 하려다가 “엄마는 커서… 춤 잘 추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춤 잘 추는 할머니? 엄마는 지금도 충분히 춤 잘 추는데.”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건 내가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말투를 빠르게 흡수한다.

“응. 지금도 잘 추지만(?) 할머니가 돼서도 춤 잘 추려면 건강해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하거든.”

 아이는 이내 잠들었지만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그다음은 뭘까


창고살롱 연말회고 카드


어린 시절부터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진로 희망을 꿈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10대, 20대 내내 간절히 원했으니 꿈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기자를 그만둔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다행히 늘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다음, 또 그다음. 머릿속에 하고 싶은 일/해야 할 일/할 수 있는 일의 대차대조표를 그리며 서른일곱이 됐다.

요즘 남편은 내게 꿈에 그리던 일을 하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냐고 묻는다. 지속 가능하게 일하고 싶은 여성들의 커뮤니티 ‘창고살롱’​을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그동안 고민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실현해가고 있다. 막바지 작업 중인 <내 일을 지키고 싶은 엄마를 위한 안내서>​도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둔 프로젝트였다.

남편의 말이 맞다. 직장 다니던 때와 비교하면 경제적 안정감은 사라졌지만, 하고 싶은 것과 하고 있는 것이 일치하니 삶에 이질감이 사라졌다. 고작 론칭 한 달이지만 일과 삶에 대해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창고살롱 안에서 서로 연결되면서 가능성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A부터 Z까지 모든 걸 주체적으로 결정하고 만들어가는 과정도 버겁지만 즐겁다.

그런데 이걸 꿈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이 일들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 걸까. 창업을 했으니 사업을 안정화하고 지속가능성을 찾는 게 가장 큰 목표겠지만 그게 내 꿈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꿈이라면 좀 더 본질적이어야 할 것 같달까.


얼마 전 창고살롱 연말 회고&새해 작심 세션을 진행하면서도 멈칫한 순간이 있었다.

‘내년 나의 키워드, 내가 찾고 싶은 레퍼런스’를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는데 잠시 고민하다 ‘서울 아닌 다른 곳’이라고 썼다. 신기하게도 고민을 갖고 있는 레퍼런서들이 몇 있었다. 우리는 귀농, 귀촌에 대해. 지역에서의 삶에 대해. 디지털 노마드에 대해. 전원주택의 낭만과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뒤로, 매일 시간을 보내던 집이 참을 수 없이 갑갑해졌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 이 집이 내 일상의 대부분이 될 텐데.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그저 내일, 다음주, 다음달만 생각하다 갑자기 시야가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주어가 ‘나’가 아닌 글

이 영화 못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찬실은 영화밖에 모르는 삶을 살다 어떤 사건 이후 영화를 할 수 없게 된다. 좌절을 겪은 찬실은 자신이 원하는 게 진짜 뭔지 깊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찬실은 말한다.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진짜 꿈이 아니라고. 이제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다고.


새해 목표 중 하나는 내가 너무 큰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주어가 ‘나’인 글을 많이 썼다. 알바를 전전하는 대학생인 나, 늘 퇴사를 꿈꾸는 직장인인 나, 딸인 나, 아내인 나, 며느리인 나, 엄마가 된 나.

자본주의에 분노했고 가부장제에 분노했고 여성이 지속 가능하게 일할 수 없는 현실에 분노했다. 그러면서도 늘 주어는 ‘나’였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내가 너무 애달프고 안쓰러웠나 보다.

요즘은 내가 주어가 아닌 글을 많이 쓴다. 창고살롱 채널에 올라가는 글을 쓰고, 레퍼런서들의 대화를 정리하고, <내 일 안내서> 작업을 하면서 인터뷰이들의 말을 다듬는다. 아, 최근에는 처음으로 내 이름이 아예 들어가지 않는 알바 글도 써봤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글이라고 생각하면서 쓰니 묘한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처음 해본 일은 또 있다. 창고살롱 ‘글쓰기 살롱’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다. 글쓰기 수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해왔다. 취재 기자로 일할 때는 그냥 배설하듯 글을 써냈다면, 편집 기자로 일하며 하루에 수십 개의 글을 편집하면서 글쓰기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소셜벤처에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할 때 글 쓰는 게 참 괴로웠는데 그때의 경험이 창고살롱 론칭할 때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모든 경험은 어떤 식으로건 내게 쌓인다는 걸 믿게 됐다.

사실 글쓰기 수업 같은 건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쯤 돼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 요즘은 내가 가진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려 한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잘 정리해서 공유하고, 내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글쓰기 살롱에서 타인의 글을 깊게 읽고 피드백을 하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아, 나는 이 일을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창고살롱 살롱지기로서 하고 있는 것, 하려는 것도 비슷한 결의 일이다. 세심하고 예민하게 사람을 관찰하면서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저렇게 해보면 어때, 쿡쿡 찔러주는 것. 판을 깔아주는 것. 그 과정을 뾰족하게 정제해서 콘텐츠로 만들고 알리는 것. 내가 꼭 주인공이 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동업자 혜영님과 함께 ‘인터뷰로 레퍼런스 찾기’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이건 창고살롱 밖에서) 한 분이 그런 말을 했다. 유재석이 나오는 <놀면 뭐하니>를 보고 있으면 유재석이 부캐를 하나씩 늘려가는 게 부럽다고. 내게도 김태호 PD 같은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 이야기를 혜영님과 공유하면서 창고살롱이 김태호 PD 같은 존재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도 몰랐던 내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고 연결시켜 주는 곳. 물론 이 모든 게 수익과도 연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고.


그래서 내 꿈은 김태호 PD인가.


여전히 꿈이 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목이 말라서 했던 행동들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는 또 다른 우물을 파고 있다. 이곳 저곳 깊이 깊이 파다 보면 알게 되겠지. 내 꿈이 뭔지. 어떤 할머니가 될지. 가끔은 눈 앞에 우물뿐만 아니라 숲도 보며 파고 또 파면 말이다. 모두 해피 뉴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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