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여자들] <스위밍풀> 속 사라
취재를 마치고 함께 간 동료와 소맥을 마셨다. 식사를 마치고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어두운 거리로 나오자 동료는 담배를 꺼냈다. 입에 담배를 문 동료는 내게 물었다.
현진님은 담배 피워본 적 없죠?
이 기시감은 뭐지. 예전에도 누군가 비슷한 얼굴로 물은 적 있다. "현진이는 클럽 가본 적 없지?" 예상이 맞다. 마흔 해 가까이 살면서 나는 담배를 피워본 적도 클럽을 가본 적도 없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해본 적도 연락 없이 잠수를 타본 적도 없다.
'사임당 홍씨'.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 중 하나였다. 정갈하게 탄 가르마에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를 보고 친구가 지어줬다. 복장만큼이나 품행도 방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교육 시스템이 싫어서 자퇴를 꿈꾸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탈 한 번 없이 성실히 공부하는 모범생이었다.
스물두 살에 만난 남자와 8년 연애 후 결혼했고 처음으로 들어간 직장에서 9년을 일했다. 더는 두발 단속이나 복장 단속을 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도 머리와 옷은 무난과 단정 사이를 맴돈다. '튀거나 민폐를 끼치면 절대 안 돼'라고 어딘가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밖에 나가면 주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을 조심한다.
줄리 : 대마초는 안 태우겠죠?
사라 : 어째서? 책은 표지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야. 태울 만큼 태워봤어.
영화 <스위밍풀>에서 아마도 20대인 줄리의 질문에 사라는 나와는 다른 대답을 한다. 대마초를 태울 만큼 태워봤고 섹스도 해볼 만큼 해봤다는 사라 모튼(샬롯 램플링)은 영국의 범죄소설 작가다.
지하철에서 팬이라며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부와 성공 모두 얻었지만 사라는 이제 살인과 수사물이라면 신물이 난다. 최근 수사물이 아닌 새로운 책을 냈지만 반응은 영 시큰둥하고, 출판사에서 우연히 마주친 촉망 받는 젊은 작가는 "어머니가 팬"이라고 강조한다.
▲ 성공한 여성 작가 사라 모튼(샬롯 램플링)은 슬럼프를 겪고 있다. ⓒ 코리아픽처스
슬럼프를 겪고 있는 사라에게 출판사 편집장 존은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기분 전환을 하고 오라고 한다. 사라는 존에게 연애 감정을 갖고 있지만 존은 사라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는 듯하다. 늙은 아버지를 홀로 집에 두고 사라는 혼자 프랑스로 떠난다. 입에 담배를 물고.
프랑스에 있는 존의 별장은 "작은 천국" 같다. 우중충한 영국과 다른 환상적인 날씨에 책상이 있는 2층 방 발코니에서는 녹색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숨어 있던 창작열을 되찾은 사라는 노트북을 열고 작업에 몰두한다.
영화 속에서 사라는 나만큼이나 무난하고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습관적으로 주변을 정돈하는 사라는 욕망을 절제하는 삶을 산다. 가게에 장을 보러 가서 다이어트 콜라와 요거트만 잔뜩 사고,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술을 시킬까 고민하다 결국 차를 시킨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 순간에도 사라는 스스로를 감시하는 것 같다.
별장의 고요와 평화는 존의 딸 줄리(루디빈 사니에)의 등장과 함께 깨진다. 줄리는 사라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집에서도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사라와 달리 줄리는 옷을 잘 안 입고 있고(영화에는 줄리의 노출신이 많이 나온다) 정리도 잘 하지 않는다. 줄리는 밤마다 다른 남자를 데리고 와서 시끄럽게 섹스를 한다. 누가 보건 말건 누가 듣건 말건 줄리는 자유분방 그 자체다. 욕망을 절제하는 사라와 달리 줄리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분출한다.
별장에는 커다란 수영장이 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한 수영장은 커다란 검은 방수포로 덮여 있다. 낙엽이 가득한 수영장에서 줄리는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알몸으로 수영을 한다. 수영을 마친 줄리와 선베드에서 원고를 보고 있던 사라의 대화는 두 사람의 상반된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사라 : 난 수영장은 질색이란다.
줄리 : "저도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저도 바다가 더 좋아요. 부서지는 파도, 언제라도 발을 헛디디면 휩쓸려 버린다는 공포감. 수영장은 따분해요. 아무런 흥분이 없죠. 무한한 느낌이 없어요. 그냥 욕탕 같아요.
사라 : (수영장은) 살아있는 박테리아 시궁창 같아.
사라는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는 줄리가 짜증 나면서도 동시에 줄리에게 호기심을 느낀다. 사라는 자꾸만 줄리를 훔쳐본다. 줄리는 사라의 억눌렸던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거실에서 시끄럽게 통화하는 줄리를 뒤로하고 마을 식당에 간 사라는 초콜릿 범벅 디저트를 허겁지겁 입에 밀어 넣는다. 옆에는 이미 비워진 와인잔이 놓여 있다.
줄리가 외출한 밤, 사라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줄리가 사둔 푸아그라와 와인을 몰래 먹는다. 사라는 줄리를 혐오하면서 동시에 욕망한다. 사라는 '줄리(Julie)'라는 이름의 폴더를 만들어 줄리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줄리는 모르게.
▲ 줄리(루디빈 사니에)는 사라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다. ⓒ 코리아픽처스
겉으로 좀처럼 욕망을 드러내지 않는 사라를 보면서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았다. 내 안에도 사라처럼 '여기까지'라고 선명하게 그어둔 선이 있었다.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일, 부끄러운 일이었다.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엄격하다. 나도 그랬다. 내가 그어둔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면서 내 기준을 넘어선 사람을 쉽게 손가락질했다. '나라면 절대 안 저럴 텐데,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사는 걸까'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평가했다. 동시에 나와는 너무 다른, 나는 결코 될 수 없는 존재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책 <숲속의 자본주의자>에서 박혜윤 작가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내가 그것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해준다"라고 말한다. 자꾸만 거슬리는 존재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무엇이 나를 건드리는 것일까 생각해 보려 한다. 그곳에는 어김없이 나의 욕망이 서성대고 있다.
다시 밤 외출을 나가는 줄리. 사라는 "네 엄마가 딱하군"이라며 "밤마다 다른 남자와 들어오는데 맘이 편하겠니?"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러자 뼈를 때리는 줄리의 한 마디.
그거 알아요? 아줌마는 히스테리 부리는 영국 여자예요. 추잡한 건 죄다 쓰면서 실천은 못하잖아요. 고상한 척 마세요.
사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다. 줄리의 말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살아온 사라는 외로워 보인다. 사라 역할을 맡은 샬롯 램플링은 대사를 할 때보다 하지 않을 때 눈빛과 표정만으로 더 많은 서사를 들려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라는 처음으로 수영장에 들어가 수영을 한다. 몰래 훔쳐본 줄리의 일기장에서 줄리 엄마의 사진을 발견한 사라는 줄리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하고 줄리의 삶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사라와 줄리의 경계는 점차 허물어진다. 사라는 줄리처럼 경계심 없이 남자들과 대화하고, 줄리는 그런 사라의 모습을 훔쳐본다.
사라가 외출한 날, 줄리는 사라가 자신에 대해 쓴 글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줄리는 복수라도 하려는 듯 사라가 관심을 보이고 있던 마을 식당 직원 프랭크를 집에 데리고 온다. 다음 날, 프랭크가 사라지고 수영장 근처에서 핏자국이 발견된다.
오랜 시간 수사물을 써온 사라는 특기를 발휘해 살인 사건을 수사한다. 그리고 줄리가 프랭크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 프랭크를 죽였냐고 묻는 사라의 질문에 줄리의 답변이 흥미롭다.
모르겠어요. 아줌마나…책을 위해서였을까요?
사라는 이번에도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살려 줄리가 프랭크의 시신을 은닉할 수 있도록 적극 돕는다. 줄리는 왜 자신을 돕냐고 사라에게 묻는다. 나도 궁금했다. 사라는 왜 줄리를 도왔을까. 프랭크는 심지어 자신과 '썸'을 탔던 인물이기도 하다. 혹시 줄리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 걸까. 아니면 자신이 쓰는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줄리가 필요했던 걸까. 줄리의 질문에 사라는 되묻는다.
왜 도우면 안 되지?
▲ 줄리를 만나며 사라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 코리아픽처스
올해 들어 나는 모범생답지 않은 일탈을 선택했다.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백수가 된 것이다. 첫 번째 퇴사, 두 번째 퇴사 모두 그다음을 정해놓았다면 세 번째 퇴사는 달랐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모든 것을 멈췄다.
지난해 심각한 번아웃을 겪으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소진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은 곧 나였고 나를 쉴 새 없이 태우며 일했는데 더는 태울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씨앗을 뿌리기 전에 황폐해진 땅을 쉬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내게 안식년을 선물한 이유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신나게 놀겠다고 선포했지만 처음 3개월은 매일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빡빡한 투두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면서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 여백의 시간이 뭉텅이로 주어지니 오히려 불안했다. 이러다 금세 또 일자리를 알아보게 될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아침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운전면허를 땄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나니 그제야 정말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식년을 결심하면서 가장 큰 계획은 '예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 해보기'였다. 계속 쓰던 근육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을 써보고 싶었다. 캠핑 가서 남편 도움 없이 혼자 텐트를 쳐보고, 어린이집 사람들과 함께 작은 텃밭을 가꾸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피아노를 다시 배웠다.
바쁘다는 이유로, 퀄리티 있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나씩 해보고 있다. 종종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노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날들이다.
쉼의 시간을 보내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일에 몰입해서 정신없는 일상을 보낼 때는 너무 쉽게 화가 났다. 부정적인 일이 생기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상황을 탓하고 나를 탓했다. 삶의 변수에 취약했다.
요즘 나는 부정적인 일을 마주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내게도 일어났을 뿐이고,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내 안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영화에서 "왜 도우면 안 되지?"라고 되물을 때 사라의 말투는 경쾌하다. 여유는 유연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익숙한 질문을 뒤집을 수 있는 유연함은 여유에서 나온다.
사라는 "모든 게 정상인 것처럼 보여야 해"라며 줄리에게 관리인 마르셀을 평소처럼 부르라고 말한다. 정원을 살펴보던 마르셀이 프랭크를 묻은 땅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을 본 사라는 다시 한번 예전의 사라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공개할 수 없지만 이 장면을 보며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 지금껏 머물던 안온한 세계를 부수고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달라진 건 사라뿐만이 아니다. 줄리는 사라에게 죽은 엄마의 원고를 넘긴다. "이걸 아줌마한테 드리면 엄마가 되살아날 것 같"다며 "만약 아줌마에게 영감이 된다면 훔쳐서 사용"하라고 한다. 사라는 줄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 책 제목은 '스위밍풀'이다.
▲ 영화 <스위밍풀> 포스터 ⓒ 코리아픽처스
<스위밍풀>은 무려 약 20년 전인 2003년에 나온 작품이다. 고백하건대 이 영화를 선택한 건 8할이 포스터 때문이었다. 포스터에는 파란 수영장 옆에 비키니를 입고 누워 있는 금발의 여자 줄리가 있다. <스위밍풀>은 여름 '야한 영화'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18세의 곱절만큼 나이가 들어서도 18금 영화를 봤다고 밝히는 건 여전히 멋쩍다. 이놈의 모범생병. 이런 글을 쓰는 것 역시 예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