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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16. 2023

엉덩이 가볍게 글쓰기

글 한 편을 끝까지 완성하는 법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살아오다 보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집중력 있게 글 한편을 뚝딱 써낼 것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독자들은 완성된 정제된 글만 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주제 잡고 개요 짜고 노트북 앞에 앉아서 다다닥 초고 쓰고 퇴고하고 제목 뽑고 발행!


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글을 쓸 때 나는 아주 산만하고 매우 끙끙댄다. 지금 이 글을 쓰려고 아침에 책상에 앉았지만(원래는 다른 원고를 마감할 생각으로 앉았다가 딴짓이 제일 재밌으니까 갑자기 이것부터 쓰고 싶어져서) 몇 자 쓰다가 커피 한 잔 마셔야지 하고 커피를 내려왔고, 몇 자 쓰다가 트위터 열어서 요즘 빠져있는 아이돌 덕질을 했고, 몇 자 쓰다가 인스타 열어서 주변인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염탐했고, 몇 자 쓰다가 음악을 다른 걸로 틀어야 할까 고민하고 있다. 음악이 마음에 안 들면 또 글을 못 쓰니까. 아, 원래 쓰기로 했던 글을 일단 써볼까. 오늘까지는 보내야 하는데. 그런데 아까 인스타에서 봤던 피드가 자꾸 생각난다.


그래서 내가 무슨 글을 쓰려고 했더라.


나는 주로 집에서 글을 쓴다. 집에서는 산만해서 일이 잘 안 된다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내가 너무 산만한 게 부끄러워서 카페에 갈 수 없다. 카페에 가면 물론 지금만큼 딴짓을 하지 않는다. 집중력 있게 효율적으로 일하는 현대인 코스프레, 할 수 있다. 아주 잠깐은. 그런데 코스프레를 하는 내내 손발이 묶여 있는 느낌이 든다. 중간중간 딴짓을 하고 싶어질 때마다 누가 볼까 신경 쓰이고 그런데 딴짓은 하고 싶고 그냥 마음 편히 집에서 츄리닝에 목 늘어난 티셔츠 입고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얼마 전 공유작업실에 갈 일이 있었는데 자꾸만 시선이 밖으로 쏠렸다. 옆자리에서 하는 이야기는 왜 이리 잘 들리는지. 네트워킹이고 뭐고 나는 역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밖에 없는 집에서는 아주 대놓고 산만하게 글을 쓴다. 글이 안 풀리거나 집중력이 떨어질 때마다 데스크톱이 있는 서재(이자 옷방)에서 쓰다가 거실 식탁에서 노트북으로 쓰다가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쓰는 식으로(아이폰 메모장이나 구글 독스로 쓰기 때문에 어느 디바이스를 쓰든 연동이 가능하다) 환경을 전환해 준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너무너무 마음에 안 들고 이건 망했는데 싶으면 샤워를 한다. 집에 있으면서 자주 안 씻으면 사람이 곪는다. 홈웨어에서 홈웨어로 갈아입더라도 깔끔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샤워를 하도 안 된다? 그럼 선크림을 바르고 밖으로 나간다. 햇살을 맞으며 푸른 나무를 보며 걷다가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구글 독스를 연다. 신기하게도 집에서 컴퓨터로 볼 때는 지독히도 안 보였던 실마리가 밖에서 걷다 보면 어떻게든 보인다. 이 부분은 별로구나, 이 부분은 이렇게 고치면 되겠다, 생각보다 이 부분은 괜찮은데?


글을 쓸 때는 내 안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글을 읽게 될 독자를 끊임없이 의식해야 한다. 글을 쓸 때는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아니 더 많은 눈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집안에서 집 밖에서 산만하게 환경을 바꾸며 나는 여러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된다. 내 글을 이렇게 저렇게 요리조리 관찰하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샤워를 해도, 산책을 해도 소용이 없을 때는 일단 멈춘다. 엉덩이 무겁게 하나의 글을 붙들고 있는다고 글이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 글이 너무 지겨워질 때도 있다. 사유도 어휘도 어쩜 이렇게 앙상하지. 왜 이렇게 진지해. 왜 이렇게 재미가 없어. 이 글을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온갖 혐오와 회의가 밀려든다.


손희정 평론가가 여성 영화감독들을 인터뷰한 책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에는 윤가은 감독이 이창동 감독에게 들었던 질문이 나온다.


“예상치 못하게 큰 상을 받고 나니, 그다음 작품이 문제였다. “진짜 잘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줄 알았지 “잘 만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세 번을 뒤엎고 겨우 써 간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 수업 지도교수였던 이창동 감독이 말했다.

“나쁘지는 않아. 그런데 너는, 이 이야기를 믿니?”

윤가은은 그 질문에 매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온 그저 “있어 보이는 무언가”에 대해 만들려고 했다는 것을.”

-손희정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중에서


이 대목을 읽은 후부터 나는 내가 쓴 글을 내가 믿을 수 있는지 생각한다. 진짜 내 안에서 나온 글이 아니라 그럴듯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쓴 글을 내가 믿지 못하는데 독자들이 믿을 수 있을까. 믿음은 애정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내 글에 대한 혐오와 회의가 찾아올 때는 일단 컴퓨터 앞을 떠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로운 마음으로 키보드 앞에 앉는다. 전날까지만 해도 그토록 못나 보이던 글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다(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글은 이런 식으로 몇 년에 걸쳐 쓰기도 한다. 내가 내 글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이 모든 과정에서 나 자신에게 끝없이 되뇌는 말이 있다. 우스울지도 모르겠지만, 말하는 나도 좀 오글거리지만, “나는 이 글을 완성할 수 있다”라고 되새긴다. 이번 원고는 아무래도 망했다 싶을 때마다, 그만 쓰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마감을 못한다고 담당자에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될 때마다 주먹을 불끈 쥐며 ‘나는 쓸 수 있다’고 외친다. '나는 끝까지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든 글을 쓰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글을 완성한 경험은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를 쓰게 한다.


그러니 끝내 글을 써낼 나를 믿기를. 이 문장을 쓰기 전에 나는 샤워를 한 번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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