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9일을 추억하며)
누가 슬리퍼, 하이힐을 신고도 한라산에 오른다고 했던가. 내가 지리산 한 자락에 오를 때 그 동네 꼬마들이 슬리퍼 신고 오르는 걸 보긴 봤지만 거긴 본격 지리산도 아니었고 여긴 본격 한라산이란 말이다.
등산화를 가져갈까 말까를 고민했다는 자체가 위대한 멍충이라는 증거였다. 돌들은 사과만 했다가 훌쩍 수박만 해졌다가 금세 그 이상이 되었다. 게다가 전날은 비가 왔더랬다. 촉촉해진 돌땡이들. 죽이고 싶었다. 한라산 감상? 개뿔. 넘어져서 발목 나가고 머리 깨질까 두려워 발끝만 쳐다보고 올랐다.
‘진달래밭 대피소’ 가기 전까지 찍은 사진이 달랑 요 2장이다. 이때만 해도 ‘이 정도면 한라산도 괜찮네’라고 생각한 시점이다.
나는 방콕녀로 운동을 거의 안한 인간이며, 등산 초보인 데다가 아침에 1시간 이상을 헤매서 시간에 쫓기고 있다. 적어도 12시 30분엔 ‘진달래밭 대피소’에 들어가야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을 거 아닌가(1시엔 정상을 향해 올라야 한다). 쉴 수도, 계속 오를수록 없는 지경이 반복됐다. 처음엔 친구와 조잘댔지만 곧 우리는 과묵해졌다.
속밭, 샘터에서 모두 쉬며 물 마시고 초콜릿 바 먹고... 오로지 진달래밭 대피소의 라면만 바라보고 올라갔다. 맞다. 옛날 청계산에 오를 때도 이 친구랑 갔었지. 그때도 친구가 정상에 가면 쮸쮸바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끝까지 갔었다. 아, 나란 인간, 동물이구나. 라면이 뭐길래.
<진달래밭 대피소>
결국 왔다. 40분 전이었나? 30분 전이었나? 우선 화장실부터 다녀오고 매점에 들렸다. 라면! 내 사랑 라면. 육신은 지쳤는데 매점에 가자 ‘먹는언니’의 자세가 발동되었다. 이왕이면 다양한 걸 먹어보고 리뷰를 올려볼까? 재미있을 것 같은데.
라면밥도 먹어봤으나 떠먹기가 힘들었다. 값도 비쌌는데 그냥 라면을 먹는 게 나을 뻔했다. 아무튼 이것도 국수는 국수인지라 후기는 썼으니… ( http://welikenoodles.com/220386249781 )
아주 오랜만에 혹사당한 발들은 아우성이었다. 체면이고 뭐고 등산화를 벗어던지고 양말 빨로 앉아서 밥 먹었다. 1편에서 이야기했다. 저 등산화가 너무 발에 꼭 맞는다고. 등산양말까지 신었으니 발가락들이 오죽했겠는가.
신발 벗고 아무 데나 앉아서 라면을 호록호록하고 있자니 방송이 나온다. 1시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정상은 2시 30분까지만 갈 수 있는 곳이니 빨리 출발하라는 거다. 거기까지 약 1시간 30분이 걸린다나.
사실 ‘진달래밭’까지 왔으니 그다음은 그래도 수월할 줄 알았다. 올라온 게 남은 거보다 많았으니까. 근데 말이지. 경사는 어쩔 거냐고. 알지? 오를수록 경사가 급해지는 거? 산은 뾰족하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은가. 여기까지 왔는데 백록담은 봐야 하지 않겠나. 이를 악물고 올랐다. 친구는 정상에 아이스크림을 팔았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하지만 한라산이 청계산도 아니고… 있을 리가,라고 하면서 ‘혹시나’라는 생각을 솔직히 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길에 찍은 유일한 사진인데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쉴 때 찍은 거다. 엄청 경사진 계단이 있었고 가다 쉬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올랐다. 우리를 반겨주는 건 엄청난 벌레 떼들. 눈, 코, 입으로 들어가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한 10분 남겨놓고 도착했나? 등산 초보인 나는 2시 30분까지 못 올라갈까 봐 진짜 걱정했다. 이렇게까지 악을 쓰며 올라왔는데 정상을 코앞에 두고 내려가야 했다면 울었을지도…
됐다. 교과서에 나오는, 대한민국 최고봉인 한라산에 올랐다. 강신주가 그랬다. 그냥 때려치지 말고 해보고 때려치우라고. 그래, 나 이 정도면 이제 등산 때려쳐도 되지 않겠니?
인증샷을 찍고 있자니 또 방송이 들린다. 이젠 빨리 내려가라고. 오르는 곳곳에서 아주 잔소리가… 알았다고. 내려간다고.
자, 이젠 내려가는 일만 남았지?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풋. 천만의 말씀. 내려오는 게 더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참, 한라산 정상에선 아이스크림을 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