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원절
병철이는 어제 고등보통학교 시절의 친구들과 만나서 놀면서 들었던 얘기를 하려고 석재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석재는 태식이와 만나서 새벽 2시까지 술을 먹고 들어왔던 것이다.
석재가 병철이에게 말했다. "물 좀 줘라!, 목이 많이 마르네...", 병철이는 바가지에 물을 한 움큼 담아서 석재한테 건넸다. 석재가 물을 마시는 동안 병철이가 말했다. "넌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는 알고 있었니?"
석재는 병철이한테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 잠시 있다가 말을 했다. "뭐가?"
병철은 말했다. "건원절이라고 하더라...", 석재는 병철이에게 물어봤다. "건원절? 그게 뭐 하는 날인데..."
병철은 이어서 말했다. "우리 임금님 생일이라자나...", "그래서 어제 우리가 떡이며, 막걸리, 김치전... 이런 음식들을 읍내 거리에서 마음껏 진탕 먹을 수 있었다는 거 아니냐..."
// 1907년 8월 7일 궁내부 대신 이윤용이 대한제국의 황제인 순종의 탄신 경절을 '건원절'로 개칭하자고 상서를 올렸고 이를 윤허하면서 1908년 3월 25일 순종의 생일날을 국가 경축일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
석재는 방안 구속에 놓여있던 담배 한 개비를 주워서 갖고 나왔다. 그리고 병철에게 불 좀 달라고 했다. 부엌 아궁이에 지펴놓은 불에 나뭇가지를 태워서 석재에게 전해줬다.
그리고 석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참 동안 호흡을 하면서 담배 연기를 한 움큼 내뱉었다. 그러면서 석재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 좋다, 역시 담배는 아침에 피워야 제 맛이다.", "우리 임금님 생신이라고 했지?, 그래서 태식이 놈이 나를 불렀던 거로구나." 병철은 석재가 만났다는 태식이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었다.
석재는 병철이한테 말을 했다. "태식이라는 녀석이 작년까지 궁에서 일을 했다고 하던데, 나라 안 밖으로 시끄러워서 일을 그만두고 나왔다고, 그리고 지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하네...", "그러면서 자기가 필요한 심부름이나 부탁하는 것을 좀 들어주면 하루 품삯을 챙겨서 주겠다고 하더라고..."
병철이가 대답했다. "아, 그래서 새벽까지 둘이 술을 마셨던 모양이군...", "암튼, 할 일도 없이 젊은이가 놀면 뭐 하니... 그렇게라도 돈을 모아야지...", "그나저나 몸 생각해서 이젠 술도 적당히 마시게나,..."
이제 3월이 되어서 봄의 기운이 퍼져가고 있었다.
병철이는 석재와 함께 있다가 집을 나와서 저잣거리로 걸어 나섰다.
오늘도 아이들은 역시나 뛰어다니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시장에 순찰을 다니는 일본인들이 서 너 명씩 보였고, 병철은 그들과 마주치는 것이 불안했는지, 속히 국밥 한 그릇을 먹으려고 가던 길로 이동했다. 그렇게 5분을 걸었을까, <골목집>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가게 하나가 보였다.
병철이는 입구에 들어가면서 말했다 "아주매, 여기 국밥 한 그릇 주시오." 가게 안에서 손님들에게 음식을 나르던 여성이 대답했다. "네, 바로 가져다 드릴 테니, 저쪽으로 앉으시죠"
가게 안쪽 구석에는 고급진 한복을 입은 사내 세 명이 앉아서 있었고, 그들은 국밥과 부침 전을 시켜놓고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조명하, 고신국, 박무열이었다.
마침 국밥이 나와서 병철이 앉은 곳에 가져다 놓았다. 곧바로 병철은 나무 수저를 사용해서 먹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 앉아있던 세명 중, 고신국이 부침 전을 한 접 떼어서 먹으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여보시게, 내가 어제 최 선생을 만나서 직접 들었네만, 얼마 후에 종로에서 공연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말이지 그곳에는 연극과 함께 중간중간에 서양악기를 사용하는 음악이 동원되어야 하는데, 이를 연주할 사람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음악에 필요한 악보들이 준비되어야 한다고 하더군..."
그 우편에 앉아 있던 조명하가 대답했다. "아, 그래? 서양악기와 연주 악보라...", 앞편에 앉아 있던 박무열이 말했다. "여보게 거문고나 가야금 말고 악기라면, 도대체 어떤 것을 연주한다는 말인가?"
고신국이 대답을 했다. "맞아, 그대들이 궁금할 테지,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서양악기에 대해서 궁금해서 최 선생에게 물어봤다는 것 아닌가...", "바이올린과 첼로라는 악기가 있다고 하더라고"
박무열이 말했다. "바이러...? 체라...", "참 발음하기 어렵네...", 조명하가 옆에서 대답했다. "이 친구야, 서양악기이니 부르기도 어렵겠지... 하하", 그렇게 셋은 종로에서 있을 공연과 서양악기에 대해서 한창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앞쪽에서 국밥을 먹고 있던 병철은 자신이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종로에서 공연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던 것이다. 한복이나 차려입은 자들이 이런 허름한 국밥집에 와서 수다를 떠는 것이 썩 못마당했는지, 국밥값을 주고 나온 것이다.
병철은 다시 시장 골목을 걸어가면서 혼잣말로 말했다. "애라이, 뭔 사내들이 수다는 그리 떨고 있니..."
그 시각에 석재는 병철이가 가져다준 누룽지를 물에 끊인 후, 배추 말린 것을 얹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여분이 지났을 때, 배가 불렀는지, 겉 옷을 하나 걸쳐 입고서 문 밖을 나왔다.
어제 태식이가 말했던 얘기가 생각이 났다.
(어제저녁에 만났던 일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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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식이는 석재에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석재는 태식이한테 대답했다.
"나야... 항상 그렇지. 고등보통학교 나온 후, 특히 잘하는 것이 없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뭐든 부탁을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해주고 하루 대가를 받으면 그것으로 먹고 그냥저냥 살았어."
태식이가 이어 말했다. "이 친구 예나 지금이 변한 게 없어... 그래도 고등보통학교를 나왔으면 뭐 하나라도 배워서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난 그동안 궁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일을 배우면서 살아왔었지...", "오늘은 마침 날이 날인만큼, 궁에서 일했던 때가 생각이 나는구먼... 암튼 난 요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
석재가 말했다. "그림? 지금 그림이라고 했나...? 햐,... 그런 재주가 있었다니... 참 부럽군,..."
태식이는 말했다. "자네도 요새 들은 소문들이 있어서 알겠지만, 일본인들이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모두 다 알려고 한다네,... 오죽하면, 나라의 왕인 임금까지도 갈아치우는 놈들이니 원..."
작년에 고종이 폐위된 후, 순종이 즉위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 일제가 강제로 체결한 한일 신협약에 의하여 나라의 모든 국가 운영에 대해서 일제 통감부의 승인을 받고 진행되어야 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순종을 즉위시킨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 통치를 시작하겠다는 선전포고와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
태식은 바로 일제가 작년에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왕으로 즉위시킨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것이다.
석재는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흠,... 참 어지러운 지경이군...", 태식이 말했다. "그렇지?"
석재가 대답했다. "그래, 이 막걸리를 몇 잔 마시면 참으로 어지럽고 기분이 참 묘하다는 말일세..."
태식이가 말했다. "내가 소에게 말을 하는 게 낫지, 그러면 그렇지 자네가 술보다 더 중요한 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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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일련의 일이 떠올랐고,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연재소설 '악보 제작소(3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