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에는 가슴 떨리는 아침이
있다

by 레드산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아침을 맞는다. 창호지를 바른 격자무늬 방문에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촘촘히 매달렸다. 누가 일부러 막는 것도 아닌데 서로 먼저 들어가겠다고 티격태격한다. 용케 방문을 타고 넘어 들어온 밝은 햇살은 수줍은 듯이 방바닥에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무렇게나 둘둘 말은 이불로 등을 받치고 잠에서 덜 깬 몸을 겨우 일으킨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데 소리 없이 찾아와 발밑에 앉아 있는 아침 햇살을 마냥 모른척할 수 없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방문에 매달린 아침햇살을 멍하니 바라본다. 명상에 깊이 빠져든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진다.

창호지 문을 헤치고 들어온 햇살은 유리창을 타고 들어온 날카로운 햇살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순하고 부드럽다. 아무 생각 없이 그 햇살을 바라보고 있으면 점점 더 깊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마음은 말 할 수 없이 차분해진다. 딱히 무엇이라고 말 할 수 없는 충만함이 내안에 가득해진다. 사랑하는 여인의 손을 잡듯이 손을 뻗어 방바닥에 내려앉은 아침 햇살을 어루만진다.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진다. 나도 모르게 엷은 미소가 피어오르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따스한 감성이 샘물처럼 솟는다. 이렇게 행복한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었나.

밤새 몸을 녹여주었던 뜨끈한 방바닥에서 선뜻 몸을 일으키지 못한다. 반쯤 누운 상태로 꼼작 않고 아침 햇살과 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말없이 이어지는 우리의 대화를 방해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침부터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없다. 지켜보는 이 없이 저 혼자 웃고 떠드는 TV 소리도 없다. 어디론가 서둘러 떠나는 숨 가쁜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방은 방바닥에 떨어지는 바늘소리가 들릴 것처럼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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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찾아온 세상의 아침은 어떤 모습일까?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다. 세월이 갈라지는 소리에 놀라 그때까지 방문에 매달려 있던 아침 햇살이 엉덩방아를 찧는다. 얼른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눈을 뜬다. 지금의 세상이 아닌 그 옛날 어느 시대에 와있지 않을까 싶어 잠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싸늘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든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청량하고 쌉싸래한 시골마을의 아침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축 늘어졌던 몸 안의 세포들이 앞 다투어 깨어난다. 물보다 깨끗하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두 손에 가득 담아 얼굴을 문지른다.

지난밤 춥기는 꽤 추웠나 보다. 이엉을 두껍게 쌓아 올린 초가지붕에는 떠꺼머리총각 머리에 내려앉은 눈처럼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밤새 추위를 이겨내느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장독대 항아리들은 노인네의 흰 눈썹처럼 하얗게 셌다. 퍼즐을 맞추듯이 쌓아올린 돌담과 벼 밑동만 남긴 들녘도 하얗게 변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밤새 곯아떨어진 사이에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 눈이 내린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의 아침 경치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하얗게 내려앉은 서리는 밝은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어린 날에 보았던 시골 경치보다 더 목가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목구멍이 헉하니 막히도록 감동이 밀려온다. 이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지난 기억속의 시골 경치와 정취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초등학교 겨울방학 때, 시골 외갓집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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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 마을은 시간의 흐름을 거부한 채 한쪽에 뚝 떨어져 있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화선지에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인다. 지금이면 도시는 한창 정신없이 바삐 돌아갈 시간이다. 돌담 너머로 보이는 외암 마을의 들녘은 딴 세상처럼 그저 평온하다. 마을은 시간만 멈추어 선 게 아니라 진공상태에 놓였다. 절대의 고요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보아도 무엇하나 들리는 소리가 없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온갖 소음에 부대끼며 살다보니 이렇게 마주한 고요함이 무척이나 낯설다. 그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 어느 먼 옛날 속에 나 홀로 뚝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지금의 이 완벽한 고요와 평온함 그리고 여유를 오래도록 붙잡아 두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아산 외암 마을은 이번이 네 번째이고, 마을에서 하룻밤을 머문 건 두 번째다. 7~8년 전, 매섭게 추웠던 한 겨울에 와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는 후배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듯이 따라와 겨울밤을 보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날의 겨울밤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유난히 추었다. 마을은 옴짝달싹 못하게 꽁꽁 얼어붙었고, 한밤중에는 가당치 않은 바람이 불었다. 얼마나 추웠던지 문고리에 손이 쩍 달라붙을 정도였다. 기세등등하게 새까만 밤을 휘젓고 다니는 바람 소리가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다. 그날의 매서운 추위와 세찬 바람이 어린 날의 겨울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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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사정없이 불어대는 세찬 바람소리를 들으며 후배들과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였다. 꽤 시간이 지나 술기운을 깨려고 슬그머니 자리를 나와 어둠의 한가운데에 섰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 갈가리 찢어놓을 것처럼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렇지만 사나운 겨울바람은 알코올이 질러놓은 내안의 불기둥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제 세상처럼 설쳐대던 찬바람을 밀쳐내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은 까만 게 아니라 아주 새까맸다. 어디 한군데 빈틈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맣게 칠해진 도화지였다. 그 까만 밤하늘을 배경 삼아 둥실 떠 있는 둥근 달이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검은색 도화지에 점점이 박힌 수많은 별은 세상 그 어느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늘 이고 사는 하늘에 이렇게 별이 많았나?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본지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무엇에 쫓겨 그리 정신없이 살았는지 하늘에 별과 달이 있는 것도 잊었다. 그때 어디선가 밤잠을 이루지 못한 늙은 개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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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도 없는 그 겨울밤의 경치와 정취가 참으로 좋았다. 매섭고 날카롭게 추웠던 겨울밤의 추위 속에서 잃어버렸던 감성이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의 겨울을 생각나게 했던 그 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잊히지 않는다. 그날 밤의 분위기와 느낌이 가슴 한복판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도장을 찍어놓았다. 어렸을 때의 겨울은 늘 이랬다. 그러던 겨울이 이제는 겨울 같지 않은 겨울 행세를 한다. 손발이 얼어터지게 추었던 어린 날의 그 매서운 겨울이 늘 그립다. 이젠 그 겨울마저도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렸다.

지인들과 함께 한 아산 여행에서 외암 마을을 숙박지로 정했다. 다시 한 번 그 겨울밤의 정취를 느껴보고 싶었고, 그것을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룻밤을 머물 집도 고르고 골라 직접 예약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도 좋지만, 서정적인 분위기와 정취를 맛보려고 초가집을 택했다. 나지막하고 둥그스름한 초가지붕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런 마을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초가집에서의 하룻밤은 가슴 따스한 즐거움과 추억을 안겨준다. 외암마을에는 현재의 시간 속에 지워지지 않는 과거가 존재한다. 그 시간을 제대로 만나려면 하룻밤을 머물러야 한다. 다음번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평상에 드러누워 여름밤의 별을 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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