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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Mar 15. 2022

추억은 소중한 보물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 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 『인연』의 장수(長壽) 편에 나오는 글이다. 이렇게 공감이 가도록 추억을 표현한 글은 여태 보지 못했다. 몇 번을 읽는 것으로도 모자라, 형광펜까지 칠해가면서 반복해 읽었다. 그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웠던 일들이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면 내 삶의 반짝이는 보물이 된다. 세상에 보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보물처럼 소중한 추억이기에 사람들은 생각날 때마다 꺼내놓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닦고 또 닦는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자마자 포대기에 싸여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껏 서울에서 살고 있으니 서울 토박이요, 서울이 고향이다. 그런데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에도 서울이라고 해야 하는데 부산이라고 잘못 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면서도 부산이라고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그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어렸을 때 일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있는 모양이다. 6~70년대에는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을 서울깍쟁이라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버지의 고향인 김해와 부산에는 작은아버지와 사촌들이 많이 산다. 방학이 되면 김해 시골집에 자주 내려갔다. 고만고만한 사촌들과 잘 어울려 놀다가도 별거 아닌 일로 틀어지면 사촌들이 서울내기 깍쟁이라며 놀렸다. 어린 마음에 나만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 그 말이 무척이나 싫었다.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부른 것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 대한 내 생각은 따로 있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수도이자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들이 가장 먼저 들어오고 서울 사람들은 그것들을 가장 먼저 접했다. 그런 만큼 서울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양식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까 오래된 전통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지방 사람들의 시각에서는 못마땅한 점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서울깍쟁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닌가 싶다. 


어른들이 그러니까 아이들도 따라 했다. 다만 아이들이 그렇게 따라 한 건 서울에 대한 동경심과 부러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어찌 되었든 그런 놀림의 대상이 되는 게 싫어 시골에 가면 서울내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게 잠재의식 속에 있어 나이가 들어서도 서울 사람보다 부산사람이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 같다. 어린 날의 이런 일들도 이젠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두어 달 전이었다. 일이 있어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서울생활사박물관을 알게 되었다. 처음 들어보는 박물관이라 호기심이 갔지만, 박물관에서 하는 “서울 멋쟁이” 기획전이 결정적으로 마음을 잡아끌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서울생활사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았다.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서울의 지난 옛 모습을 보면서 잊고 있었던 지난 추억을 꺼내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3월에 접어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풀린다. 화창하고 따스한 햇볕이 아무 데라도 좋으니 밖으로 나가라고 부추긴다. 못 이기는 척 핸드폰에 저장한 여행 메모를 살핀다. 그때 맨 밑에 적혀 있는 서울생활사박물관이 보인다. ‘그래! 여기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라 메모를 보자마자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카메라를 챙겨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 홀로 여행이라 자동차의 엔진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노원구에 있는 서울생활사박물관은 예전 북부법조단지의 법원과 검찰청 건물을 리모델링해서 만들었다. 해방 이후 서울시민들의 일상사를 결혼, 출산, 교육, 주택, 생업 등의 주제로 꾸몄다. 서울시민들의 삶의 이야기와 전시물들을 통해 지난날 우리들의 모습을 되돌아볼 수 있다. 그때 그 시절의 정겨운 사진들과 낯익은 전시물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오랜만에 빛바랜 가족사진을 꺼내 보는 것 같다. 박물관을 둘러보는 동안에는 굳이 타임머신을 타지 않아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추억의 시공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전시물 속의 옛 시간으로 돌아가면 돌아가신 부모님이 계시고, 좁은 방에서 함께 뒤엉켜 살았던 형제들도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을 살아내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추억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든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장난감 가게에 들어선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모른다. 봇물 터진 것처럼 밀려드는 그 많은 추억 중의 어느 것을 먼저 끌어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물론 어렴풋이나마 그때를 기억할 수 있는 세대들에게는 공감을 뛰어넘어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맞다 맞아! 그때는 저거를 썼는데!” 앞에 가는 아주머니가 발걸음을 멈추고 들뜬 목소리로 혼자 말을 한다. 눈길이 꽂힌 전시물 앞에서 좀처럼 떠나지를 못한다. 아주머니가 보는 전시물을 옆에서 보면 나 역시도 속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다 큰딸이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 예전의 패션을 보여주는 전시관 흑백 TV에서 그때의 패션쇼 장면이 나온다. 젊은 날의 영화배우 엄앵란 씨와 김지미 씨가 보인다. 앞서간 딸이 아빠를 부르는데, 아빠는 TV 앞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기다리다 못해 돌아온 딸과 아내에게 아빠는 한창 들떠서 배우들을 가리키며 그 시절의 이야기 한다. 아빠의 목소리에는 추억의 즐거움이 가득 배어있다. 


전시물 중에는 말할 수 없이 반가운 것들이 많다. 박물관 1층에 있는 옛날 브리사와 녹색 포니 택시는 어린 시절 동네 골목에서 함께 뛰놀던 옛 동무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전시물에 손이 가려고 한다. 어찌나 반갑던지 다른 관람객이 없었으면 슬쩍 만져보았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그렇게 크고 넓어 보였던 차가 이젠 장난감처럼 보이니 지나간 세월의 더께만큼 눈이 많이 커졌다. 


초등학교 졸업사진이 딱 한 장 있다. 졸업식에 오신 어머니와 단둘이 찍은 사진이다. 어머니가 가지고 오신 빨간색 졸업증서 통을 가슴에 품고 찍은 사진이다. 요즘은 졸업증서 통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때는 졸업식 날 나누어주는 졸업장을 거기에 넣어 집으로 가져왔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에는 몇 개의 통이 있지만, 대부분 집에서는 하나를 가지고 형제들이 내리 사용했다. 


기억 속에 그 빨간 졸업증서 통이 전시장에 놓여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찍던 그 순간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얼굴을 스쳐 간 차가운 바람까지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금 내 옆에 계시는 것 같아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주먹만 한 덩어리가 속에서 올라와 목구멍을 꽉 틀어막는다.

 


60년대에는 시험을 쳐서 중학교에 갔다. 초등학교 4~5학년이 되면 그때부터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는 유명한 과외선생이나 일류대학 학생에게 과외를 시켰다. 우리 세대에 부모님들은 자식이 최소한 네댓이었다. 그때는 나라는 물론 개개인의 살림도 어렵던 시절이라 자식들 먹이고 가르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도 허리가 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어지간한 집에서는 과외공부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끝나갈 무렵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이젠 시험 없이 중학교에 간다고 알려주셨다. 다들 좋아서 손뼉 치고 소리 지르며 난리를 쳤다. 내가 중학교에 가던 해부터 시험이 없어지고 추첨으로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어느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한 사람씩 나가 팔각형의 추첨기를 돌렸다. 추첨기 안에는 어느 학교를 표시한 은행알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우리는 그거를 뺑뺑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뺑뺑이 1회다. 


무시험의 행운을 가져다준 그 추첨기도 전시장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묵은 때가 가득한 것을 보면 예전에 돌렸던 바로 그 추첨기가 틀림없다. 추첨기는 정말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즘 같으면 컴퓨터로 순식간에 처리할 일을 그때는 학생들이 하나하나 돌렸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이 추첨기 덕분에 나는 중학교를 두 군데나 다녔다. 처음 배정받은 학교가 집에서 너무 멀어, 2학년 때 집에서 가까운 학교로 전학했다.


이것들 말고도 추억을 건드리는 게 하나둘이 아니다. 어머니가 청소할 때마다 애지중지하며 닦고 또 닦았던 TV가 있다. 나무로 된 장식장 속에 TV가 들어 있던 것으로 그때는 고가의 가전제품이라 함부로 만지지도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왕자파스도 있다. 방학이 되면 좋기는 하지만 늘 넘어야 하는 고비가 있다. 과목마다 수우미양가로 표시한 생활통지표는 늘 우리를 떨게 했다. 버젓이 놓여 있는 생활통지표가 떨림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 가는 여행도 즐긴다. 오늘처럼 추억을 마음껏 꺼내 볼 수 있는 이런 곳은 혼자 가야 한다. 누구의 간섭이나 눈치를 볼 것 없이 혼자서 오롯이 즐기고 마음껏 느껴야 한다. 인생은 짧고, 세월은 화살처럼 빨리 지나간다고 한다. 오늘 이렇게 지난날의 추억을 되짚어 보니까 꼭 그런 건만도 아닌 것 같다. 지나온 시간이 짧게 여겨지지 않는다. 또 세월은 내가 끌어안은 만큼 흘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추억을 이야기한 피천득 선생의 글귀가 다시금 생각난다. 역시 추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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