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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May 17. 2022

구미정이 품은 경치에 무릎을 친다

구미정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어감이 비슷해서 그런지 나는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나오는 꼬리가 아홉 개인 구미호가 생각난다. 또 고풍스러운 한옥에서 각종 요리가 푸짐하게 차려지는 고급스러운 한정식집도 생각난다. 무엇이 생각나던 현대적인 분위기보다는 우리의 옛것을 연상하게 한다. 가볍게 시작하려고 꺼낸 이야기니까 무엇이 떠오르던 신경 쓸 건 없다. 

구미정(九美亭)은 정선군 임계면에 있는 정자다. 과장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정자를 만날 때마다 꼭꼭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무척이나 기쁘다. 나이가 들수록 웃을 일이 점점 줄어든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 헤어질 때마다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고. 누구나 기쁘면 미소가 절로 나오고 참으려고 해도 웃음이 나온다. 여행길에서 보기 좋은 정자를 만나면 바로 그 미소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어디를 여행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그 지역의 정자를 찾는다. 정선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정자를 구경한 기억은 없다. 오랜만에 다시 가는 정선이라 이번에는 갈만한 정자를 찾았다. 즐겨 이용하는 지자체 홈페이지에서는 정자를 찾지 못했다. 볼 만한 정자가 없는 건가 싶어 이번에는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니까 그제야 딱 한군데 구미정이 나왔다. 

다녀온 사람들이 올린 사진들을 보니까 구미정의 주변 경치가 예사롭지 않다. 그동안 정자 여행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감으로 볼 때, 구미정은 그야말로 월척이었다.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구미정을 보는 순간, 놀라운 주변 경치에 입이 딱 벌어졌고, 쉴 새 없이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였다.

 


그동안 꽤 많은 정자를 보았다. 새로운 정자를 볼 때마다 여기가 최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자가 품은 경치는 하나같이 멋있고 아름다웠다. 정자 여행은 까도 까도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양파처럼 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구미정이 보여주는 경치는 보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나중에 또 어떤 정자가 더 멋진 경치를 보여줄지는 모르겠지만, 눈 앞에 펼쳐진 구미정의 경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만하다. 

구미정은 조선 숙종 때, 공조 참의를 지낸 수고당 이자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조정 당파싸움에 실망해 관직을 버리고 정선에 내려와 은거 생활을 하면서 구미정에서 피서와 풍류를 즐겼다.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의 구미정 경치가 이럴진대 그 당시의 경치는 오죽했을까. 구미정에서 빼어난 경치를 벗으로 삼아 여유로운 생을 보낼 수 있다면 그깟 관직이 대수일까 싶다. 

내게도 여유만 있다면 경치 좋고 전망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세상을 잊은 듯이 살고 싶다. 이런 바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간절해진다. 아마 이런 바람은 나뿐만 아니라 중장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꾸는 꿈이다. 사람은 어차피 한세상을 살다가 떠나기 마련이다. 젊을 때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세월을 끌어안으면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고 가볍고 여유롭게 사는 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좋다. 

강원도는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땅이다. 이런 곳에 자리 잡은 정자라 걸맞은 아름다운 경치가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자 주변은 물론 그 일대가 암반 지대이다. 구미정은 널찍한 암반 위에 올라앉았다. 앞에는 가늠할 수 없는 묵직한 세월의 절벽이 마주하고 있다. 그 절벽 밑으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른다. 흐르는 물은 널찍한 소를 이루고 있어 또 다른 멋스러움을 보여준다. 이 모든 자연이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경치를 완성했다.



구미정은 웅장한 주변 경치에 걸맞을 정도로 크다. 다만 아쉽다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구미정은 짓다가 만 것처럼 보이는 미완성의 모습이다. 정자의 전체적인 모습은 제대로 되어 있는데, 방이 있는 공간은 벽체나 문이 없고 기둥과 뼈대만 있다. 사랑에 눈이 멀면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게 다 좋아 보인다. 그것처럼 구미정이 멋진 경치를 품고 있어 미완성인데도 그 나름대로 멋스럽게 보인다. 어쩌면 미완성의 정자라 경치가 더 멋있게 보이고, 더 진하고 강한 느낌과 여운을 주는지도 모른다. 

구미정은 정자에서 아름다운 9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건, 학창 시절 한 번쯤 해본 커닝하는 기분이 들어 굳이 늘어놓고 싶지 않다. 그중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만 이야기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정자에서 즐길 수 있는 경치를 이렇게 세세하게 풀어놓은 걸 보면 옛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삶의 여유와 낭만이 훨씬 더 많았던 것 같다. 

요즘은 여행도 일상처럼 계획적이고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목적지를 정하면 그곳에서 볼 것을 미리 정하고, 계획했던 것을 보고 나면 바로 다른 곳으로 간다. 우스갯소리로 노래 가사처럼 대전 찍고 대구 찍고 부산 찍으러 간다. 이와 달리 옛사람들은 진득하게 한곳에서 머물며 세세하고 소소하게 구경거리와 즐거움을 맛보았던 것 같다. 

구미정의 9가지 아름다운 경치 중에서 확실하게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건 세 가지이다. 정자 맞은 편 층층 절벽의 층대(層臺), 넓고 큰 바위 평암(平巖), 그리고 맑은 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징담(澄潭)이다. 구미정과 마주하고 있는 절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하는 멋과 웅장함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럽거나 보는 이의 마음을 위축시키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정자와 마주 보고 있지만, 시야가 가려지는 갑갑함은 없다. 정면에 초대형 스크린이 걸려있는 영화관을 보는 느낌이 든다. 층층의 절벽에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은 물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아득한 세월의 멋스러움이 새겨져 있다. 구미정 마루에 앉아 절벽만 바라보고 있어도 정자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하고도 남는다. 

절벽 아래로 남한강의 상류인 골지천이 흐른다. 물만 흘렀으면 조금 심심한 경치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조물주는 거기에 넓고 큰 바위들을 앉혀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그것으로도 뭔가 부족해 보였는지 맑은 물이 잠시 머물도록 소를 만들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밝은 햇살이 떨어지는 골지천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물비늘이 있어 숨 막히게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를 구미정이 독차지했다. 

정자를 둘러보는 동안 괜스레 마음이 바쁘다. 셀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연이나 구미정이 금방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마음이 급해지는지 모른다. 어디 한 군데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정자를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같은 듯 다른 모습에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지금의 이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사진으로 담는다. 이러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급해진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될 수 있으면 여유롭고 자유로운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하지만 구미정 같은 정자를 만나면 순식간에 흥분이 되어 그런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이자 선생이 이런 모습을 본다면 “어허~~” 하면서 혀를 찼을 게 틀림없다.

 


구미정은 암반 위에 있다. 주변 일대가 전부 암반이라 평탄한 곳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형에서 구미정 자리만 평평한 걸 보면, 이 자리는 애초부터 구미정을 위해 배려된 자리가 아닌가 싶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구미정의 모습은 어떨까? 조심히 바위를 타고 밑으로 내려간다. 구미정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한 암반 위에 있어 밑에서 보면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를 보는 듯하다. 거기에 암반 사이사이 봄꽃이 피어있어 멋스럽기까지 하다. 

성이 차도록 보고 나서 구미정 마루에 걸터앉는다. 마주 보이는 절벽의 멋스러움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 절벽 위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날씨에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온다. 얼굴을 간질이는 봄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지고 작은 행복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잠깐만 앉아 있으면 머릿속은 이내 하얗게 변한다. 

정자 여행의 매력 중 하나가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어느 정자를 가도 사람들로 북적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너무 한적하고 조용해서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구미정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라고는 먼저 와 있던 중년 부부가 전부다. 그들마저 떠나자 남는 건 들려오는 골지천의 맑은 물소리뿐이다. 

구미정에서 머무는 시간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과 별개로 여겨진다. 봄날에 이보다 좋은 날씨는 있을 수 없다. 자연으로 정화된 눈에는 아름다운 경치가 가득 담긴다. 귀에는 잔잔하게 들려오는 맑은 물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물소리는 소리 없이 흘러 가슴속을 지나간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성을 그대로 누를 수가 없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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