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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Sep 23. 2021

쿰쿰한 그 책 냄새를 아직 기억한다

시간 따라 세월 따라 사라진 것들이 많다. 흔하게 사용했던 것들, 당연히 있는 것으로 알았던 것들이 어느 날 보니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어디 하나둘이겠나 마는 그 많은 것 중에는 헌책방도 있다. 학창 시절을 보낸 70년대에는 도시마다 헌책방이 많았다. 특히 유명했던 헌책방거리는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 그리고 인천 배다리였다. 청계천 헌책방은 그 시절 더러 이용했던 곳이라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계천 큰길을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헌책방이 줄지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딱히 갈 일이 없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그 많던 헌책방이 하나둘 사라졌다. 오랫동안 가 보지 않아 요즘 상황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몇 군데 남아 있는 헌책방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몇 해 전, 부산을 여행하면서 보수동 헌책방거리를 가 보았다. 예전의 규모나 상황이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수동 헌책방거리는 영업하는 책방이 많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마주 보고 늘어서 있는 헌책방과 그사이에 비좁은 길이 정겨웠다. 보수동 헌책방거리는 부산에서 가 볼 만한 관광명소로 자리매김했다. 그 때문에 여행 삼아 찾아오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아쉬웠던 점은 구경하는 사람은 많은데 실제 헌책을 구매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기회가 되지 않았다. 인천에 부모님 위패를 모신 사찰이 있다. 기일을 맞아 사찰을 찾은 김에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있을까 싶어 배다리 헌책방골목을 갔다. 배가 닿는 마을 혹은 배를 대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라고 부른다. 지명에서 정감이 넘치는 배다리는 경인 철도가 생기기 전까지 배가 드나들던 갯골 포구였다.



포구에 어쩌다 헌책방골목이 생긴 걸까?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가지고 있던 책들을 고물상에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그 책들이 배다리 시장으로 흘러들어와 헌책을 파는 노점이 형성되었다. 그 이후에는 전쟁으로 재난을 입은 사람들과 월남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헌책을 배다리 시장에 내다 팔면서 자연스럽게 배다리 헌책방골목이 형성되었다.

배다리 헌책방골목도 인천에서 가 볼 만한 곳으로 선정되어 있다. 그 때문에 부산 보수동 헌책방거리와 비슷한 규모와 형태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막상 마주한 배다리 헌책방골목은 솔직히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했다. 헌책방골목이라고 하지만 남아 있는 다섯 군데 헌책방이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휴가철에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남의 속도 모른 채, 사정없이 내리쬐는 날카로운 햇살이 참 밉상스럽다. 헌책방이 많지 않아 살펴보는 데 크게 시간이 걸릴 게 없다. 날씨가 찌는 듯이 무더워 서둘러 헌책방으로 들어간다. 

거리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그런지 헌책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이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다.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냉기가 반갑게 달려든다. 순식간에 더위를 날려버리는 그 찬 공기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하다. 헌책방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머릿속의 시계는 순식간에 70년대로 돌아갔다. 쿰쿰한 책 냄새가 나는 비좁은 공간에서 선풍기 하나로 더위와 맞서던 그때 그 시절로… 헌책방답게 높은 책장까지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조그마한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이 가득하다. 그렇게 책이 많아도 깔끔하게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다. 

옛 생각을 떠올리며 헌책 냄새를 찾는다. 요즘은 어디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다. 예전에 청계천 헌책방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달려들었던 것이 쿰쿰한 책 냄새였다. 그것은 헌책방에서만 맡을 수 있는 상징적인 냄새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책 냄새를 여전히 기억한다. 아무리 후각을 예민하게 끌어올려도 그 책 냄새는 찾을 수 없다. 예전과 달리 책들이 나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고 있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헌책방이라고 하지만 실내 분위기는 밝고, 책들도 상태가 좋아 보인다. 70년대의 헌책방과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이렇게 변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추억의 옛 모습과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산더미처럼 어지럽게 쌓여 있던 책들과 발 디디기도 어려웠던 작은 공간, 대낮에도 어스름했던 분위기 그리고 코끝을 자극하던 쿰쿰한 냄새가 뒤엉킨 옛 모습은 이제 추억 속에 파묻혔다. 

다른 곳은 어떨까 싶어 한군데를 더 가봤지만 마찬가지였다. 헌책방이라고 변화를 거부하고 옛 모습 그대로 있었다면 지금처럼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판매장의 상태와 분위기에 민감한 요즘 사람들에게 옛 모습의 헌책방은 관심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개인적인 성향 차이가 있겠지만, 구경삼아 헌책방을 찾는다면 얼마나 만족할지 모르겠다. 헌책방을 제대로 보고 즐기려면 읽고 싶은 책이나 사고 싶은 책이 있어야 한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그때그때 핸드폰에 저장해놓는다. 독서량이 많지는 않지만, 은근히 책 욕심이 있다. 저장해놓은 책들은 신간도 있고, 출간된 지 제법 오래된 것도 있다. 요즘은 책값이 만만치 않다.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이렇게 메모했다가 중고 책을 종종 구매한다. 인터넷 서점에서 중고 책을 사기도 하지만, 인터넷 서점에서 운영하는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가끔 간다. 인터넷 서점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서점에서 책을 찾으면서 보내는 시간과 분위기가 좋다. 

헌책방에 온 김에 읽고 싶었던 책을 사려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 혼자 그 많은 책 중에서 원하는 책을 찾는 게 무리이다. 책 제목을 말하면 컴퓨터로 재고 여부를 확인해주겠지 했는데 그게 아니다. 그 많은 책이 본인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책 제목만 말하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반신반의하면서 책 제목을 말한다.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재고 여부를 알려준다. 자판으로 컴퓨터에 제목을 입력하고 엔터 키를 누르는 것보다 더 빠르다. 아쉽게도 찾는 책들의 재고가 없다.

 


대학 다닐 때가 생각난다. 그때는 학기 초가 되면 교재를 사려는 학생들로 청계천 헌책방이 북적였다. 형편이 어려워 헌책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에게 새 책값을 받아서 헌책을 사고 남는 돈을 쓰려는 이들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싸고 깨끗한 책을 구하려면 이집 저집 발품을 팔아야 했다. 삥땅 좀 치려다가 된통 당하는 때도 있었다. 제목대로 헌책을 사기는 샀는데, 책 내용이 많이 바뀌어 사용하지 못하는 때가 왕왕 있었다. 이때는 새 책을 다시 사야 하니까 그나마 꿍치고 있던 용돈까지 털어야 했다. 

요즘은 학생들이 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다양하다. 그때는 중고등학생 과외를 하는 것 말고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다 과외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하고 또 인정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 주머니는 늘 썰렁했다. 

그렇지만 피 끓는 청춘들은 먹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청춘사업에도 돈이 필요했고, 친구 사이에 의리와 우정을 위한 막걸릿값도 필요했다. 그때 헌책이 때론 가뭄의 단비처럼 도움이 되었다. 그 헌책이 젊은 날 우정과 사랑에 이바지한 공로가 지식 전달에 못지않다고 하면 너무 억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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