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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Jun 14. 2022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초당에서 세상을 굽어본다

이럴 때 어떤 속담이 어울릴까? 소 뒷걸음치다 쥐를 잡다? 꿩 대신 닭? 전북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 있는 두암 초당(斗巖 草堂)을 만난 건 이런 식으로 행운이었다. 고창은 아내의 고향으로 두 분 처형이 살고 있어 무시로 드나들었다. 고창을 드나든 지 30여 년이 넘어 이제는 어지간한 고창사람만큼 고창을 안다고 자부한다. 그동안 고창에서 보았던 정자는 취석정 하나뿐이었다. 고창은 기름진 황토 땅이라 복분자, 수박 등 특산물이 많이 나오는 풍요로운 고장이다. 이런 고장이면 역사와 전통 있는 정자가 많이 있지 않을까 늘 생각했다. 


서너 달은 되었다. 딱히 할 일이 없던 휴일에 컴퓨터를 켜고 이런저런 것들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고창에 있는 영모정과 두암 초당을 알게 되었다. 검색에 뜬 영모정을 보는 순간, 그러면 그렇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창에 취석정 말고 또 다른 정자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맞은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좋았다. 기분이 좋은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인터넷에 나와 있는 내용은 제대로 보지 않고 메모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왜 그렇게까지 착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착각을 했다. 그때는 영모정이 정자라고 생각해 영모정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두암 초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동안 일 년에 최소 두세 번은 고창을 갔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2년간 가지 못했다. 느낌으로는 그 시간이 잠깐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직 코로나의 어두운 터널을 다 빠져나온 것은 아니지만, 터널 끝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보이는 곳까지는 와 있는 것 같다. 5월 들어 사회적 거리두기를 비롯해 우리의 일상을 숨 막히게 조였던 조치들이 완화되었다. 이젠 가도 되겠다 싶어 오랜만에 고창을 갔다.


고창에 도착한 다음 날, 영모정과 두암 초당을 보러 처형 집을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모정이 정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선입견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다. 초당(草堂)은 억새나 짚, 풀로 지붕을 이은 작은 집을 말한다. 크기만 작을 뿐이지 집은 집이라 정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분위기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은 온통 영모정뿐이었다.

 


아산초등학교에 차를 세우고 영모정과 두암 초당을 찾으러 갔다. 다행히 학교에서 불과 200여 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가는 길에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바위산이 보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흔히 보는 나무가 우거진 산이 아니라, 수직의 거대한 바위산이 당당하고 웅장하게 치솟아 있다. 그 바위산 밑에 자그마한 초당이 붙어있는데, 어떻게 저곳에 집을 지었나 싶어 신기했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사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멋있고 아름다웠다. 그것도 잠시, 두암 초당이 저 정도이니 영모정은 오죽할까 싶어 내심 뛸 듯이 기뻤다.

 

산길 초입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영모정이나 두암 초당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두암 초당만 설명되어 있다. 정작 보려는 영모정에 대한 안내문은커녕 정자 비슷하게 생긴 건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뭐가 잘못되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살펴봐도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뭐가 뭔지도 모르게 헤매고 나서야 바로 코앞에 있는 널찍한 한옥이 영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모정은 정자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재실이었다. 인터넷에 나온 자료를 제대로 보지 않고, 영모정의 “정”자만 보고 섣불리 정자로 단정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 마음은 두암 초당으로 재빨리 돌아선다. 걸어오면서 두암 초당에 마음이 갔던 건 사실이다. 다만 정자로 착각한 영모정이 더 멋진 모습을 보여 줄 거라는 착각에 그 마음을 눌렀을 뿐이다. 두암 초당은 회색을 띠고 있는 수직 절벽 아래에 걸려 있다. 눈대중으로 대략 3~40여 m가 되어 보이는 수직 절벽 아래에 있어 아슬아슬해 보인다.

 


어떻게 저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싶어 호기심이 잔뜩 일어난다. 걸어올 때는 높고 험해 보여서 올라가지 못하는 줄 알았다. 점점 가까워지면서 초당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여 다행이다 싶었다. 두암 초당 안내판 옆으로 나 있는 산길은 제법 경사지다.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런지 풀에 가려진 길이 또렷하지 않다. 다행히 밑에서 볼 때와 달리 많이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 올라가는 길에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두암 초당의 모습은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한마디로 끝내준다. 깎아지른 절벽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새집처럼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것 같다. 젊었을 때 무협지를 많이 읽어 그런지 강호를 떠나 은거한 무림 고수가 머무는 곳처럼 보인다.

 

어느 곳이든 정자를 보고 오면 그 정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 인터넷을 살핀다. 두암 초당은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안내문의 내용과 인터넷에 나와 있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이럴 땐 전문가가 아니라 어느 게 정확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이 되면 안내문에 나와 있는 내용을 기준으로 삼는다. 설마하니 실물이 있는 곳의 안내문이 틀릴까 싶어서다.


두암 초당은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했던 호암 변성온과 인천 변성진 형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다. 초당을 품은 수직 바위는 전좌 바위 또는 곡물을 터는 데 쓰는 기구를 씌운 바위라는 의미에 「두락암」이라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울퉁불퉁하게 생긴 바위 모습이 예전에 시골에서 발로 밟아서 사용했던 수동식 탈곡기를 연상케 한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개인적으로는 두락암이라는 이름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두암 초당은 수직 절벽의 아랫부분을 파내어 그 안에 건물을 집어넣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정자가 진안에 있는 수선루이다. 둘 다 바위 안에 건물을 집어넣은 형태지만, 차이가 있다. 진안 수선루는 바위굴 안에 건물을 바짝 집어넣어 바위와 건물 면이 거의 일직선을 이룬다. 반면에 두암 초당은 건물 일부만 바위 안쪽에 있고 대부분은 절벽 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초당이라는 이름처럼 규모는 자그마하다. 대략 3평 정도인데 온돌방과 마루가 공평하게 1.5평씩 나누어 가졌다. 올라가는 쪽으로 막힌 벽이 있고, 벽 너머로 온돌방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마루가 있다. 막힌 벽 쪽에서 마루 기둥 너머로 파란 하늘을 보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두암 초당과 마주 보고 있는 늘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초당과 어우러져 멋과 운치를 한껏 자아낸다.


막힌 벽에는 당대의 명필로 이름난 송태회가 쓴 ‘두암 초당’ 편액이 걸려 있다. 마루에는 고창 출신으로 호암의 후학인 김정회가 쓴 ‘산고수장(山高水長)’ 편액이 걸려 있어 예스러움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두암 초당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시원하다. 올라온 것에 비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경치는 정말이지 일품이다. 마을의 들녘은 물론 주변 일대가 훤히 보여 가슴이 뻥 하니 뚫린다. 


막힌 벽에서 마루로 가려면 발 하나를 겨우 올려놓을 수 있는 바위를 조심스럽게 딛고 가야 한다. 마루에 앉아 시원하게 펼쳐진 경치를 보고 싶은데, 마루로 가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 오늘따라 카메라 스트랩이 손목에 차는 짧은 것이라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다. 마루에서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고 싶은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뒤엉켜 망설이다 결국 포기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욕심을 부리다 두어 번 크게 사고가 날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 있다. 그 때문에 그 뒤로는 욕심을 내거나 무리하지 않는다. 그래도 아쉬움은 정말 진하게 남는다. 여행에서 멋지고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즐거움은 눈으로만 끝내선 안 된다. 마음으로도 충분히 즐겨야 온전하게 경치를 즐겼다고 할 수 있다. 정자를 찾았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초당 마루에서 즐길 수 있는 절반의 즐거움을 놓쳤으니 그 아쉬움이 더 크고 진할 수밖에 없다. 


이곳은 고창이 낳은 명창 김소희가 득음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뜻밖에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없는 게 아니라 거의 없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하긴 이름난 정자를 가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 없어 두암 초당이라고 다를 게 없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여행지가 다를 수밖에 없지만, 역사의 이야기와 함께 아름다운 경치를 품은 이런 곳을 왜 찾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두암 초당을 내려오는 발길이 아쉬움 때문인지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억지로 발길을 돌리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때마다 바위 절벽에 걸려 있는 두암 초당이 발길을 붙잡는다. 옛사람들이 두암 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술잔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상상 속의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신선이다.


두암 초당의 두암(斗巖)은 호암 변성온의 인품을 말해준다. 그의 인품은 곡식을 재는 말(斗)이나 저울의 추 같이 평정하여 모자라지도 치우지도 않아 두암이라고 한다. 학창 시절에 배웠던 ‘중용(中庸)’이 생각난다. 두암의 의미가 곧 중용이지 싶다. 요즘 같은 세태에 한 번쯤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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