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면천읍성 안에 있는 마을은 여행의 보물창고다!

by 레드산


오랜만에 재밌고 멋진 여행을 했다. 우리 속담에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 속담처럼 당진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재밌는 곳을 만났다. 애초의 목적지는 당진면천읍성이었다. 유난히 역사문화유적을 좋아하다 보니까 어디를 가던 그 지역의 역사문화유적은 빠뜨리지 않는다.


애초 목적지였던 면천 읍성도 좋았지만, 우연히 찾게 된 읍성 안쪽에 있는 마을은 숨겨진 여행의 보물창고였다. 면천 읍성은 세종 21년에 외침을 대비해서 평지에 지은 성이다. 2007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어 현재는 남문, 옹성, 장청 등이 복원되었다.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성벽이나 건물은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다.

그래도 천주교 박해와 동학농민운동 당시 전투가 있었던 무거운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남문에 오르면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둥그런 옹성(甕城)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옹성은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는 구조물이다. 아무리 많은 적이 쳐들어와도 성문을 뚫기 위해 옹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옹성의 구조상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침입한 적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어 효율적으로 성을 방어할 수 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많은 성(城)을 보았다. 그때마다 보는 옹성은 늘 감탄스러웠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나라마다 성이 있다. 대부분의 성은 성문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우리의 성처럼 옹성을 쌓은 곳은 보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성을 방어하기 위해 해자(垓字)를 팠다.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고 물을 흐르게 해서 성을 보호했다. 어느 것이 더 효과적으로 성을 보호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옹성은 대단히 기발하고 전략적인 구조물이 아닌가 싶다.


면천 읍성을 다 보았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 있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읍성 안쪽에 있는 마을로 갔다. 처음에는 먹을 만한 식당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얼마 되지 않아 재밌는 마을이란 걸 알게 되었다. 마을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7~80년대 그리고 지금의 이 시대를 넘나드는 즐길 거리가 있다. 그러다 보니 배고픔도 잊은 채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을의 건물들은 대부분 나지막했다. 7~80년대의 그 어느 날에서 시간이 멈춘 듯이 보였다. 요즘 보기 드문 옛 건물에 붙어 있는 상점의 간판들이 영락없이 그 시절의 모습이었다. 추억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볼거리는 전국 곳곳에 있다. 그런 볼거리는 그 시대를 거쳐온 사람들의 추억과 향수와 감성을 자극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관광용으로 보여주기 위해 만든 세트장 같은 시설들이다.


면천 읍성 안쪽 마을은 그와 달리 사람들이 생활하는 삶의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곳이 아직 남아있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건물 벽에 하얀 타일을 바른 이 층 건물이 보였다. 건물에는 ‘오래된 미래’라는 책방이 들어있었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서 책방이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이렇게 타일이 붙은 건물을 보는 게 정말 반가웠다.


아마 70년대였을 것이다. 그때 좀 산다는 집은 벽에 하얀 타일을 붙였다. 일종의 부의 과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우리 집은 마루 미닫이문 옆 벽면에만 타일이 붙어 있었다. 기억에서 지워진 줄 알았는데, 이 건물을 보자마자 옛집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도 생각났다. 이참에 그 추억의 사진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마을 안에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옛 건물이 있다. 풍락루(豐樂樓)라고 하는 건물로 지금은 사라진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누각이다. 원래의 이름은 반월루였지만, 중수하던 1852년 그 당시 면천 군수가 풍락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살기 좋은 땅에서 백성과 더불어 평안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었다. 풍락루는 역사 유적이지만 특별나게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역사 유적으로 특별한 존재이기보다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요즘은 눈을 씻고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간판들이 보였다. ‘이용원’ ‘전파사’ ‘다방’이라고 쓴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요즘은 이용원이나 이발소라고 쓴 간판을 보기 어렵다. 간판만 보기 어려운 게 아니라 이발소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가맹점으로 운영되는 곳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흔하지 않다.


예전에 그 많던 이발소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이발소가 없어져서 남자들이 머리하러 미용실에 가는 건지, 남자들이 미용실을 찾으면서 이발소가 없어진 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용원이라고 쓴 간판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마다 전파사가 있었다. 전파사는 전기 관련 용품들을 팔면서 고장 난 갖가지 가전제품들을 수리해 주었다. 전파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길 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여유롭게 해주었다. 연말이 되면 전파사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이 있어 다들 한껏 들뜨고 설렜다. 그랬던 전파사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다방 하면 대학에 다니던 70년 대가 생각난다. 이제 도시에서 다방을 찾는 건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 자리를 근사한 카페가 차지한 지는 오래되었다. 다방과 카페를 다 겪은 세대의 측면에서 보면 두 곳의 뚜렷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그건 머물 수 있는 시간이다.



요즘은 카페에서 하고 싶은 걸 다 한다. 책 읽고 노트북을 켜놓고 일하고 또 공부도 한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다. 예전 다방에서는 손님이 뜸한 시간에는 그나마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었지만, 손님이 많아지면 마담이나 여종업원의 태도가 돌변했다. 대놓고 나가 달라고 말을 못 하니까 오고 가며, 있는 눈치 없는 눈치를 다 주었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나가 달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 다방을 하던 분이 지금의 카페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할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을을 걷다 보면 기억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지난날의 추억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추억들이 참으로 반가웠다. 그 추억을 되새기다 보면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참 오래전의 일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만큼 살아온 세월이 작지 않다는 게 느껴져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마을 위쪽에는 면천 읍성 조종관(朝宗館)이 있다. 작년에 복원된 면천 읍성의 객사(客舍)다.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무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예전에 면천 읍성이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규모에 비하면 객사가 꽤 크게 보였다. 객사 건물이 그렇듯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어 절제된 멋스러움과 함께 역할에 어울리는 당당함을 보여주었다.



객사 옆에는 면천의 명물로 꼽히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1,100년 된 은행나무는 세월의 무게를 보여주지 못하는 객사를 대신해서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 은행나무에는 고려시대의 인물인 복지겸 장군의 전설이 배어있다. 그 때문에 이 은행나무를 신목으로 여겨 매년 정월 대보름에 목신재를 지낸다고 한다.


천년의 세월은 말이 쉬워 천년이지 상상이 되지 않는 세월의 무게이다. 그 오랜 세월을 버텨냈으니 나무라고 온전할 리 있겠는가. 굵은 나무 기둥을 보면 꼭 천년의 세월이 아니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깊고 깊은 세월이 느껴졌다, 늙고 오래된 줄기는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해 철제봉에 의지해 세월을 견뎌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볼거리가 풍성한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면천 100년 우체국이 카페로 변신했고, 책 만드는 작은 출판사도 있다. 그뿐 아니라 마을 뒤쪽 끄트머리에는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도 있다. 기와를 얹은 한옥 건물에 있는 양조장은 건물만큼이나 오래된 양조장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빠뜨릴 뻔했는데, 멋진 군자정도 있고, 영랑 효 공원도 있다. 자그마한 마을에 시대를 넘나드는 볼거리가 이렇게 많아 숨겨진 보물창고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는데 마을 구경에 빠져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먹을 것을 찾았다. 무엇을 먹을까?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면천 투어 9경(景) 8 미(味)’가 적힌 안내판을 보았다. 8 미 중의 하나가 면천 추어탕이었다. 안 그래도 추어탕을 좋아하는데, 면천의 별미라고 하니 그 맛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걸쭉한 남원추어탕도 좋고, 맑게 끊이는 청도추어탕도 좋아한다. 그 때문에 처음 들어보는 면천 추어탕은 어떨지 꽤 궁금했다.


찾아간 추어탕 집은 의외로 넓었고, 점심시간이 지난 지 꽤 되었는데도 사람들이 있었다. 추어탕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다 현지인으로 보여 제대로 식당을 잘 찾은 것 같았다. 뚝배기에 나온 추어탕은 생각지 않게 들깨가 많았다. 보는 순간에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깨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많이 들어가면 느끼하지 않을까 싶었다. 잔뜩 의구심을 품은 채 국물맛을 보았는데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뚝배기를 깨끗하게 비웠다. 면천 추어탕과 함께 면천 읍성과 성안 마을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곳은 다양한 볼거리와 색다른 매력이 있어서 한번 들르면 다시 또 찾게 될 것 같았다. 그때는 맛보지 못한 면천 두견주를 반주 삼아 다시 한번 면천 추어탕을 먹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