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어~ 참!”
다들 그렇겠지만, 기대 이상의 경치를 만나면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한때 정자에 빠져 전국에 좋다는 곳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언젠가부터 시들해져서 여행하려는 곳에 있으면 모를까 일부러 찾아가지는 않는다. 강서구를 여행하려고 갈만한 곳을 찾다가 소악루(小岳樓)를 알게 되었다.
정자나 누각하면 경치 좋은 지방에 있는 것만 떠오르기 때문에 사실 소악루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소악루가 풀어놓은 경치에 더 깊이 빠졌던 모양이다. 누각인 소악루도 좋았지만, 역시 소악루에서 굽어보는 한강 변의 경치가 일품이었다.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어지간한 경치가 아니고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 텐데, 궂은 날씨가 오히려 감성을 더 부추겼다.
양천향교를 품은 산이 나지막한 궁산(宮山)이다. 향교 담장을 따라 나 있는 길을 올라 소악루로 갔다. 궁산은 주민들이 많이 오르내리는 곳이라 포장길이 잘 되어 있었다. 가늘게 비가 내리는 날이라 그런지 산길을 오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호젓한 길을 걸어 궁산 기슭에 자리 잡은 소악루를 만났다. 역시나 소악루에도 사람이 없어 그야말로 소악루와 여행자 둘만의 추억이 될 만남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정자나 누각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들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소악루는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의 경치를 고스란히 품었다. 널찍하게 터를 닦아 세운 소악루는 누각답게 규모가 작지 아니 컸다. 그래서인지 위압적이지 않은 당당함과 묵직함을 보여주었다. 누각의 형태가 그렇듯이 사방이 툭 터져 있어 시원스러운 멋도 보여주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소악루에 들어가 보면 밖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내부가 크고 널찍해서 살짝 놀라웠다.
그렇게 멋진 소악루에도 아쉬움은 있다. 그건 누각에 흘러간 세월의 흔적과 무게가 배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의 소악루는 화재로 소실되었고, 1994년 강서구에서 신축한 게 지금의 소악루다. 신축할 때,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를 토대로 한강을 조망할 수 있게 복원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 때문에 소악루가 비록 세월의 무게는 잃어버렸을지언정 제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어 옛 명성을 되찾았다.
소악루는 조선 영조 때, 동북 현감을 지낸 이유가 경치와 풍류를 즐기려고 지었다. 중국 동정호에 있는 악양루 경치에 버금간다고 해서 소악루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동정호를 보지 못했다. 그곳이 얼마나 멋진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누각과 정자 중에는 동정호 경치에 빗대어 지은 이름이 더러 있다.
예부터 소악루에서 바라보는 한강 변의 경치가 뛰어나 시인 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그중에는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겸재 정선이 있다. 그가 양천 현령으로 있을 때, 양천 쪽에서 바라본 남산을 그린 산수화가 있다. 목멱조돈이라 불리는 그림이 소악루 난간에 있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때 그 시절의 경치를 상상하게 해준다.
겸재 정선의 그림 속 경치를 상상하려면 가슴속에 들어있는 지우개를 꺼내 들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많은 세월과 이야기를 품은 한강은 알고도 모른 척 아무 말 없이 흘러간다. 한강은 소악루 경치의 주인공이기에 손댈 것이 없지만, 한강 변에 늘어선 건물들은 깨끗하게 지워버려야 한다. 또 쭉 뻗은 올림픽대로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도 지워야 한다.
그뿐 아니라, 한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다리도 사정없이 지워야 한다. 그제야 얼추 비슷하게 겸재 정선의 그림 속 경치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림 속의 그 멋과 느낌은 온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 산천이 바뀌고 사람의 감성이 그때와 같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이쯤에서 겸재 정선의 그림 속 경치는 그만 접어두어도 괜찮다. 사실 겸재 정선의 그림을 빌려오지 않아도, 가슴이 탁 트이는 눈앞의 경치가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했다. 여행의 감동은 꼭 어디 먼 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 가까이에도 있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서울에서 누각에 올라 한강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건 분명 특별한 즐거움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가 감성을 더해주긴 했지만, 소악루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는 빼앗아 갔다. 이렇게 멋들어진 누각에 왔으면 누각 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한껏 여유를 부려보는 호사를 즐겨야 제멋이다. 오늘은 그 멋과 맛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옛날부터 두고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 그걸 알면서도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소악루를 떠났다.
‘두고 봐라! 좋은 날에 다시 와서 제대로 즐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