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육아 : 240101-240131
나는 올해 1월 1일부로 휴직에 들어갔다. 회사와 약속한 기간은 정확히 만 1년, 그러니까 12월 31일까지 직장생활을 잠시 중단하기로 한 것이다. 놀랍게도 모든 과정은 수기로 진행되었다. 거룩한 노사계약의 변경 절차다웠다. 몇 년 전부터 불필요한 프로세스 개선이라는 미명 하에 ‘전 부문의 디지털화’를 천명해오고 있는 회사의 정책과는 다소 먼 영역이구나..라고 생각할 겨를은 당연히 없었다. 잔뜩 쫄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양식의 A4 용지에는 ‘부서장’, ‘상기 본인’, ‘구내전화’, ‘통상의 노무’ 등과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즐비했다. 더군다나 휴직 사유란에 육아라는 항목도 없었다. 기타 항목에 체크를 한 다음 칸 안에 괄호를 비집어 넣었다. 꾸역꾸역 육아라고 적어냈다. 무언의 압박들, 어찌 되었든 이겨내야 했다. 그렇게 리터럴리 내 손으로 전업 육아를 진행시켰다.
부모 중 한 사람으로서 육아는 나의 당연한 과업이다. 그럼에도 고민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성 육아휴직은 아직 회사에서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힘겹게 커밍아웃을 할 때면 동료들은 머리 위로 느낌표와 물음표, 그 사이의 무언가를 떠올리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느라 바빴다. 아니 설득에 가까웠다. 아니 변명에 가까웠다. 그러다 문득 현타가 왔다. 사회적 인식에 에너지를 쓰는 내가 같잖게 느껴졌다. 본질에 집중해야 했다. 나는 왜 휴직을 하는가. 그저 해야만 했고 하고 싶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까. 마음먹은 이상 내 생활의 목적은 당분간 누군가를 돌보는 일, 단호한 결의가 필요했다. 나에게 열릴 새로운 세상을 대비해야 하는 것, 그뿐이었다.
아기는 작년 1월에 태어났다. 그 해 아내는 먼저 통으로 휴직계를 냈다. 올해는 서로의 역할을 바꾸기로 했다. 말 그대로 바통터치를 한 셈. 나는 아이의 주 양육자가 되었다. 아내에게는 가계를 위한 소득을 마련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리얼 역지사지. TV 예능에서나 보던 타인의 인생체험 프로그램이 현실에서 구현되었다. 물론 의도한 바는 아니다.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부부회의에서 의결한 우리 가족의 지침에 근거했을 뿐이다. ‘어떻게든 응당 둘이서 감당해 본다.’
그러기 위해선 전략이 필요했다. BTS 멤버가 군대 가는 순서를 짜는 것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육아는 쉼(休職)의 사유에 그치지만, 가족에게는 리소스 비중이 높은 중요 업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투를 해야 하는 원투펀치 선발 투수가 되어야 했다. 작년의 아내는 그 임무를 완수해 냈다. 올해는 내가 등판할 차례. 원활한 인수인계를 위해 손수 아내가 휴직을 한 달 더 연장했다. 모든 계획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보기 좋게 초반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일월의 콘셉트는 스프링캠프였다. 일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아내와 깊은 대화를 하는 워크숍을 가지기로 했다. 무언가 갖추어지지 않은 불편한 상황을 아이와 함께 해보기로 했다. 한마디로 육아 전지훈련을 떠난 셈이지만 사실 놀고 싶은 마음도 컸다. 이런 기회가 어딨을까 싶었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가 같이 한 달을 쉬게 되는 상황이 꽤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유한한 시간을 꽉 채우고 싶었다. 타이베이-제주 코스로 한 번, 간사이지역으로 한 번 총보름을 여행했다. 그 중간엔 돌잔치(가족 쇼케이스)를 준비하고 치러냈다. 휴가인데 살이 쫙쫙 빠지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간과했던 포인트가 있었다. 한 달 동안 24시간 내내 셋이서 붙어있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아이러니한 행복이었다. 좋았던 기분은 은은했고, 싸웠던 감정은 꽤 강렬했다. 난타전을 치러낸 작년의 투수는 걱정이 많았고, 전의에 불타는 올해의 선발투수는 의욕이 너무 앞섰다. 하루 종일 동업을 해보니 육아에 대한 스탠스가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다행인 것이었을까. 그동안 너무 큰 대화들만 나누었다는 반성을 했다. 생각들이 동기화되는 과정은 아이튠즈처럼 매끄럽지 않았다. 아기가 잠든 틈을 타서 소곤소곤 열심히 싸워댔다.
그래서 육아일기를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불현듯 결심한 생각이었다. 밀려들어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기록을 하면서 내 마음을 돌아보기로 했다. 아내와 커뮤니케이션도 보다 진솔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글쓰기는 감정에 지배당한 채로 내뱉는 내 언행을 최소화하기 위한 자구책이기도 했다. 언젠가 아이에게 건네주는 장면도 그 와중에 상상한 것도 같다.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그저 잘해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었다. 매일 연필로 꾹꾹 일기를 쓰듯 이 시간을 어딘가에 눌러 담고 싶었다. 두려움과 흥분이 공존했다. 마음이 괴로웠다. 그럼에도 승무원에게 맥주 한 잔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핑크퐁 스티커로 우는 아이를 달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현실은 매콤했다. 이렇게나 어설픈 상태인데 2월 1일은 속절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킬 약속을 하고 싶어 주간 일기를 쓰기로 했다.
여행기는 따로 정리할 예정이다.
240103(수)-240106(토) : 너의 첫 해외 여행지는 타이페이였다.
240106(토)-240112(금) : 제주 세화리에서 지냈다.
240121(일) : 가족들과 집에서 돌잔치를 했다. 동네 가게들의 음식과 장식으로 상을 준비했다. 이웃집과 단골 상점에 같이 떡을 돌렸다.
240127(토)-240130(화) : 엄마의 복직이 아쉬워 간사이의 사카이로 급 여행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