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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서관학교'에서 '학점은행제'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의 성립과 성장통

by 김경훈


지난 칼럼들에서 우리는 도서관학이 정보학을 만나 '문헌정보학'으로, 그리고 'iSchool'로 진화해 가는 세계적인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한국의 문헌정보학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요?


한국의 문헌정보학사는 식민지의 아픔, 전쟁의 폐허, 그리고 급격한 현대화의 명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1. 암흑기 속의 등불: 강습회와 조선도서관학교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는 체계적인 사서 교육 기관이 없었습니다. 조선도서관연맹(1939)이나 조선총독부도서관 주관의 단기 '강습회'를 통해 실무자를 길러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강단의 주도권은 대부분 일본인이 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해방과 함께 우리 손으로 도서관을 세우려는 열망이 폭발했습니다.

1945년 해방 직후, 박봉석 선생(한국 도서관계의 아버지)과 이재욱 초대 관장을 필두로 국립도서관(현 국립중앙도서관)이 문을 열었고, 이듬해인 1946년, 도서관 내에 '조선도서관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비록 1년 과정의 단기 학교였고 1950년 6.25 전쟁으로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지만, 이곳에서 배출된 77명의 졸업생(천혜봉, 이재철 교수 등)은 척박했던 한국 도서관계를 지탱하는 거목으로 성장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한국 문헌정보학 교육의 진정한 '발아기'입니다.



2. 대학 교육의 시작: 이화, 연세, 그리고 경북대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가던 1950년대, 사서 교육은 도서관 현장을 넘어 '상아탑(대학)'으로 진입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1955): 국내 최초로 도서관학을 부전공으로 개설했습니다. 이봉순 교수가 총장을 설득해 "일손이 부족하니 학생들을 가르쳐서라도 쓰자"며 시작했다는 일화는 당시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연세대학교(1957): 미국의 교육 원조(피바디 대학)를 받아 국내 최초로 정규 '도서관학과'를 설립했습니다. 이는 한국 도서관학이 미국식 이론과 체계를 받아들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1974년,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로 경북대학교에 도서관학과가 설립되며, 한국 문헌정보학은 서울 중심에서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됩니다.



3. "도서관학은 병원학이 아니다": 학명 변경의 역사


1980년대 후반, 한국 도서관계에도 서구와 마찬가지로 '정체성 논쟁'이 불어닥쳤습니다. 핵심은 "학문의 이름에 특정 건물(도서관)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타당한가?"였습니다.


> "의학을 '병원학'이라 부르지 않고, 교육학을 '학교학'이라 부르지 않는데, 왜 우리는 '도서관학'인가?"


이 논리는 설득력을 얻었고, 전남대(1985)를 필두로 전국의 대학들이 '도서관학과' 간판을 내리고 '문헌정보학과'라는 새로운 명패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한국의 학문 풍토가 단순한 시설 관리에서 '정보'와 '문헌'이라는 본질적 연구로 전환되었음을 알리는 선언이었습니다.



4. 성장통: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의 딜레마


2000년대 이후, 한국의 문헌정보학은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바로 사서 양성 시스템의 '양극화' 문제입니다.


현재 사서 자격증은 4년제 대학뿐만 아니라, 평생교육원이나 '학점은행제'를 통해서도 취득할 수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2014년 이후 학점은행제를 통한 2급 정사서 배출이 급증했습니다.


문제는 '교육의 질'입니다. 국제도서관연맹(IFLA)은 사서 교육이 "박사급 교수진을 갖춘 고등교육기관(대학)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과연 단기간의 학점 이수만으로 변화하는 디지털 환경과 이용자의 복잡한 요구를 감당할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다시, 기본으로


한국의 문헌정보학은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폐허 위에서 '조선도서관학교'라는 씨앗을 뿌려, 지금은 세계적인 수준의 'iSchool' 회원교(경북대 등)를 배출하는 울창한 숲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급격한 양적 팽창 속에 '전문성'이라는 뿌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때입니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서를 배출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유능하고 철학 있는 정보 전문가를 길러내느냐"를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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