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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 사이의 무한한 틈

디지털 시대의 화두

by 김경훈


"박수를 치면 두 손이 소리를 낸다. 그렇다면 한 손이 내는 소리는 무엇인가?"

이 엉뚱하고도 비논리적인 질문 앞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물리학적으로 소리는 두 물체의 충돌과 진동에서 발생하므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선(禪) 불교에서 던지는 이 '화두(Koan)'는 상식을 묻는 퀴즈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굳어버린 논리 회로를 강제로 정지시키고, 그 너머의 세계를 직관하게 만드는 정신적 충격 요법이다.


화두는 언어의 길을 끊어버림으로써(언어도단), 언어 이전의 실재를 보게 한다. "북극의 북쪽에는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처럼,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역설을 던져 우리의 정신이 기존의 궤도에서 이탈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화두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이진법(Binary)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0과 1, 참(True)과 거짓(False)이라는 명확한 구분을 통해 작동한다. 우리의 사고방식 역시 이 디지털 논리를 닮아간다. 선과 악, 좌와 우, 성공과 실패, 효율과 비효율. 모든 것을 명쾌하게 분류하고 이름표를 붙여야만 안심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삼각형이 볼 때 원은 하나의 화두이다."

제시된 텍스트의 이 문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角)과 변(邊)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의 세계관에서 각이 없는 원은 이해 불가능한 모순 덩어리다. 삼각형이 원을 이해하려면 자신의 고유한 속성인 '각'을 버려야 한다. 즉, 자기 파괴적인 사고의 확장이 없이는 결코 원이라는 차원에 도달할 수 없다. 화두는 바로 그 '각'을 깨뜨리는 망치다.



오늘날 우리는 궁금한 것이 생기면 사색하는 대신 검색을 한다. "흰 눈이 녹을 때 흰색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를 검색창에 입력하면, 과학 백과사전은 "흰색은 빛의 산란에 의한 현상이며, 얼음 결정이 물로 변하면 산란이 사라져 투명해진다"라고 3초 만에 정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이것은 '정보(Information)'일뿐 '깨달음(Enlightenment)'은 아니다. 화두의 목적은 "빛의 산란"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과 무상함, 그리고 색(色)의 본질을 깊이 묵상하는 데 있다.


검색 엔진과 인공지능(AI)은 세상의 모든 '데이터'를 줄 수 있지만, '화두'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AI는 "의식이 없다면 우주는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나 철학적 유아론을 요약해 줄 수는 있으나, 그 질문이 야기하는 인간의 실존적 불안과 경이로움을 느낄 수는 없다. 정답을 빨리 찾는 능력만이 미덕인 시대에, 화두는 "답이 없는 상태를 견디는 힘"을 요구한다.



화두 중 하나인 "규율을 구하라, 그러면 자유를 찾게 되리라"는 역설은 문헌정보학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도서관의 책들은 엄격한 분류 기호(규율)에 따라 꽂혀 있지만, 바로 그 규율 덕분에 이용자는 원하는 지식에 도달하여 지적 자유를 얻는다. 역설은 모순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진실을 품은 그릇이다.


우리는 지금 0과 1로 빈틈없이 짜인 디지털 그물 속에 갇혀 있다. 이 경직된 세계에서 숨을 쉬기 위해서는 가끔 "정적의 소리를 들어라"와 같은 화두를 던져 뇌의 회로를 흔들어야 한다.

논리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직관의 문이 열린다. "자신을 잊으라. 우주 전체가 그대를 인정해 주리라." 가장 비논리적인 문장 속에, 가장 인간적인 구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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