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히가 경고한 '효율의 역습'
경제학도였던 학부 시절, 가장 먼저 배우는 그래프 중 하나가 '수확 체감의 법칙(Law of Diminishing Returns)'이다. 밭에 비료를 뿌리면 처음에는 수확량이 급증하지만,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오히려 작물이 말라죽는다. 투입량이 늘어난다고 산출량이 비례해서 늘지 않는다는 이 차가운 경제 논리를, 인간의 삶과 사회 제도 전반으로 확장시킨 사람이 바로 이반 일리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정이자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현대 문명이 '속도'와 '성장'이라는 엑셀러레이터를 너무 쎄게 밟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의 통찰은 명확하다. "인간의 활동은 특정 한계(Threshold)를 넘어서면 효율이 감소할 뿐 아니라, 파괴적인 역효과를 낸다."
일리히가 언급한 옛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기업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지만, 과도한 압력은 결국 산업 재해나 집단적 태업, 혹은 '번아웃(Burnout)'이라는 역효과를 낳는다.
이는 문헌정보학 연구자인 나에게도 적용된다. 논문을 쓸 때, 더 많은 자료를 읽고 더 오래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더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뇌의 정보 처리 용량을 초과한 데이터는 지식이 아니라 '소음(Noise)'이 되며, 창의성을 질식시킨다. 정보 과잉(Information Overload)은 현대인이 겪는 대표적인 '일리히의 법칙' 사례다. 우리는 너무 많이 알게 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이 법칙을 장애인으로서의 일상에서도 뼈저리게 느낀다.
시각장애인에게 '스크린리더(TTS)'나 '보행 내비게이션'은 혁명적인 도구다. 하지만 일리히의 경고처럼, 이 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임계점을 넘으면 나의 고유한 능력은 퇴화한다.
예를 들어, 정보를 빨리 습득하겠다는 욕심에 스크린리더의 배속을 3배, 4배로 올리면 텍스트의 맥락과 감정은 사라지고 기계음의 타격만 남는다. 귀는 정보를 '처리'할 뿐, 마음은 내용을 '음미'하지 못한다. 효율을 위해 속도를 높였으나, 결과적으로 독서의 본질인 '사유'는 파괴된 것이다.
또한, GPS 기술이 발전할수록 나의 공간 지각 능력(Mental Mapping)은 둔해진다. 기계가 "오른쪽입니다"라고 말해주는 대로만 걷다 보면, 나는 스스로 길을 찾는 야생의 감각을 잃어버린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도구가 나를 돕는 단계를 넘어, 나를 지배하는 단계. 일리히가 그토록 경계했던 '자율성의 상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시로 돌아가야 하는가? 일리히는 기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는 '공생을 위한 도구'를 제안했다. 그것은 사용자가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으며, 인간의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도구다.
나에게 있어 가장 완벽한 공생의 도구는 최첨단 AI 안경이 아니라, 낡은 '흰 지팡이'다.
흰 지팡이는 배터리가 필요 없고, 내 손끝의 감각을 방해하지 않으며,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지팡이는 타인에게 "저는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여지(공생)를 남겨둔다.
100점짜리 효율은 없다. 100을 넘어서는 순간 그것은 마이너스가 된다.
학교가 너무 비대해지면 배움이 사라지고, 병원이 기업화되면 건강이 상품이 되며, 복지가 관료화되면 인간의 존엄이 서류 더미에 묻힌다.
시력을 잃은 후, 나는 역설적이게도 '느림'의 미학을 배웠다. 빨리 볼 수 없기에 더 깊이 듣게 되었고, 혼자 갈 수 없기에 타인의 손을 잡게 되었다.
일리히의 법칙은 우리에게 멈출 줄 아는 지혜를 요구한다.
지금 당신이 쥐고 있는 도구(스마트폰, 권력, 지식)가 당신의 삶을 돕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가?
성장의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도구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서 서로를 돌보는 '공생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