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이라는 완벽한 시스템 속에서도 '버그'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흔히 인류 최초의 여자를 이브라고 생각하지만,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의 문헌 조하르(Zohar)는 우리에게 릴리트라는 아주 낯설고도 강렬한 이름을 소개한다. 그녀는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부속품이 아니라, 아담과 동시에 진흙으로 빚어진 완벽한 대등자였다.
동등한 출발선, 그리고 최초의 불복종
릴리트는 아담과 같은 흙, 같은 숨결로 태어났다. 시작부터 그녀는 누군가의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그녀의 비범함은 선악과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녀는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 것을 보며 욕망이 결코 죄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는 좋은 동력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낙원에서의 갈등은 사소하지만 본질적인 곳에서 시작되었다. 성행위 중 체위를 바꾸자는 릴리트의 요구, 즉 "나도 당신 위에 있고 싶다"라는 대등한 관계에 대한 갈증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아담이 이를 거부하자 그녀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 금기를 깨고 스스로 낙원을 탈출한다. 무조건적인 순종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자유를 선택한 것이다.
악마화된 독립성 : 마녀가 된 여왕
낙원을 떠난 릴리트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협박이었다. 신이 보낸 천사들이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동굴에서의 외로운 삶을 선택한 그녀는 이후 전설 속에서 인어들의 어머니이자, 남자들을 매혹해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미인으로 묘사된다.
흥미로운 점은 후대의 기독교 전통이 그녀를 다루는 방식이다. '아니라고 말한 여자'를 용납할 수 없었던 체제는 그녀를 마녀, 검은 달의 여왕, 혹은 악마의 반려자로 박제해 버렸다. 이마에 남근에 대응하는 질이 달린 모습으로 판화에 그려진 것은 그녀가 가진 주체적인 성적 에너지가 당시 가부장적 사회에 얼마나 큰 공포였는지를 반증한다.
이브의 그림자, 릴리트의 유산
릴리트는 아담의 몸에서 나와 더 순종적인 이미지로 구축된 이브의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다. 그녀는 모성이나 희생을 강요받는 자리가 아니라, 쾌락 그 자체를 긍정하고 고독을 감수하며 자신의 욕망을 책임지는 삶을 살았다.
그녀가 치른 대가는 자녀의 상실과 영원한 고립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릴리트에게 '자유'라는 이름의 훈장이기도 했다. 최초의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낙원이라는 안락한 시스템 안에서 순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거친 동굴 속일지라도 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 것인가.
릴리트의 전설은 단순히 고대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숨겨진 '독립된 자아'의 목소리다. 때로는 시스템에 순응하는 이브의 모습이 편안할 때도 있겠지만, 문득 거울 속에서 검은 달의 여왕 릴리트를 만나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진정한 자유란, 누군가의 갈비뼈가 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나 자신의 무게로 땅을 딛고 서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