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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갑부훈 Sep 04. 2021

소라게 라이프 스타일

내가 제주도에 버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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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은 세화 앞바다에 산다.


우리는 세화 앞바다에서 처음 만났다. 조그만 집게로 태어나 바다를 여행하는 그가 취하는 것이라곤 겨우 버려진 소라껍데기. 하지만 그마저도 자신의 몸에 지나치게 크지도 비좁지도 않다. 집게발이 성숙하면 그에 따라 무게를 늘려가는 자연스러운 소라게


오늘 내가 느끼는 삶의 무게와 괴로움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짊어지려는 욕심과 내 집이 아닌 것을 쥐어 잡고 내려놓지 못하는 고집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필요; 인간의 생활이나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필수요소’


제주갑부 이전의 제주거지로 사는 동안 <얼마나 필요한가>는 나에게 중요한 화두였다. 제주에 정착하고 내 집이 생기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필요라는 재단 칼로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잘라내는 것이었다. 육지 고향 집에 있던 거대한 양의 짐을 제주 집으로 옮겨 놓고 보니, 13평의 집이 <언젠가 필요할지도 모르니> 카테고리에 속하는 물건들로 빈틈없이 가득 찼다. 거지 무전여행으로 충분히 짓이겨서인지, 실생활에 크게 의미 없는 크고 작은 소장품들이 입으로 후 하고 부는 약한 바람에도 훠이 날아가버리는 땅콩 껍데기처럼 집 밖으로 내쳐졌다.

 

이제 방 하나 정도 채울 양이 남았다.


다시 구구절절한 사연 가진 물건들을 며칠 동안 하나씩 어루만지며 아쉬움 없이 이별했다. 유독 미련이 그득 묻은 것들과는 4계절의 집행유예를 주어 잔 그리움이 없도록 했다. 유행은 즐기되, 따라가지 않아야 내 멋을 가질 수 있기에, 10대와 20대에 즐겨 입었던 빈티지 복고 두어 점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주인을 찾아 모두 떠나보냈다. 그리고 <없어서 낭패를 볼지도 모르는> 서류와 기록들은 모두 휴대폰으로 스캔하여 클라우드에 저장하고 나니, 옷장과 수납장에 바람이 지날 여유가 생겼다.

 

구매 후 한 번도 읽지 않은 책들도 많았다. 옷이나 다른 소품들과는 달리 책을 살 때는 충동구매에 너그러웠다. 책장 가득 채워진 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정리했다.

지식은 단순히 말할 때가 아니라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고귀해지는 법


먼저 간 내 스승들의 유언 같은 고전들은 한 줄로 요약해 내 마음 구석구석 문신처럼 새겼고, 모든 문장의 꿈은 영원히 죽지 않고 구전되는 것이기에, 내 마음에 닿은 문장들은 노래로 만들어 두었다. 책장에도 이제 바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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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무게만 소유하는 것, 그것은 소라게 라이프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다. 소라게 라이프는 (내가 선택하던, 또는 내게 주어지던) 앞으로 짊어져야 할 온전한 나의 역할, 그 무거운 역할을 무너지지 않고 거뜬히 해내기 위한 충분한 힘을 차곡차곡 기르고, 삶의 무게라는 이름으로 부딪히는 모든 괴로움과 친구 할 수 있는 강인한 집게 발을 가지기 위함이다.


소라게 라이프의 작동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소유의 간소화는 표면적으로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소모되는 유지보수 비용(이를테면 시간, 스트레스)을 줄여, 그 비용으로 머릿속 또는 마음속 필요 없는 화두를 정리할 시간을 마련해준다. 그리고 화두와 ‘나’로 연결된 수많은 선들 가운데 내 삶과 가장 본질적으로 이어진 단 몇 가닥만 남기고, 그 선을 구성하고 있는 점은 어떤 사건, 사고로 만들어졌었는지 볼 수 있게 한다.


소유가 적은 공간은 시각의 여유로움을 만들고, 이는 내면의 여유로움으로까지 공간을 확장시켜, 비워진 공간은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으로 저절로 가득 채워진다. 여기서 고요함이란 세상의 속도에 맞춰진 나의 시간을 다시 태초의 우주가 내게 준 시간으로 재설정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내일의 불안이 침범할 수 없는 오늘이라는 영원하지는 않지만, 무한한 시간을 의미하는데, 언제 어디에 있던 지간에 내가 있는 곳으로 고요함을 즉시 소환할 수 있게 되면 왕과 함께 걸어도 냉정을 잃지 않는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내 안에서 터무니없이 집을 짓고 있는 건축가를 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 가 아닌 절박함이 있어야지만이 가능하다.


다시 작은 집게발로 태어나자, 그리고 짊어질 수 있는 무게만큼만 서서히 내 집을 지어나가자.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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