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나는 카드 재발급을 위해 은행에 왔다.
한가로운 평일 오전의 작은 은행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한 중년 여성은 의자에 앉아 통화를 하고 있었고, 또 다른 중년 남성은 은행을 걸어 다니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 주변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조용하던 은행에서 갑자기 욕설이 난무한다.
중년 남성이 여성을 향해 "나가서 통화하면 안 돼? 조용히 해 씨발년아" 라며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의 입에서 온갖 '년'들이 다 나온다. 주위를 둘러봤다. 네 명 가량의 여성 행원들이 일제히 그 남성을 쳐다보고 있지만 아무도 그에게 그만하라 하지 못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남성의 욕설을 듣던 여성은 결국 은행을 나갔다. 남성은 "하여간 여자들이 문제야"라고 나를 포함해 여자들이 대부분인 이 곳에서 당당히 말한다. 그리고 20대 여성인 나와 눈이 마주친다. 순간 내가 그의 두 번째 타깃이 될 수 있을 거라 직감했다.
나는 내 머리가 '여성스럽게' 길지 않은 것에, 오늘 내 옷차림이 '여성스러운' 치마가 아닌 것에 안도했다. 내가 '여자 치고' 키가 크다는 것에, 적어도 여리여리한 여자라는 이유로 욕의 타깃이 되기 어렵다는 것에 안심했다. 나는 다리를 벌려 앉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끝까지 눈을 부라리고 쳐다봤다.
나도 참 구질구질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겁이 나는 일이다. 맞서 싸울 용기는 없으니, 부당한 꼴을 보고도 '나는 건들지 마'라는 것이 고작이라니.
그 남성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친절하게 행원에게 말을 붙인다.
약 3분 전에 일어난 소동은 자신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의 발은 조금의 경련이 일었다. 머리로는 '조금이라도 나를 해코지하면 맞서 화내야지' 하면서 몸은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의 업무를 보는 행원도 모든 신경이 그 남성에게 가있는 것을 느꼈다.
그의 업무를 보는 다른 여성 행원도, 그가 뱉는 '대구니, 조선족이니' 하는 맥락 없는 혐오 발언들에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 웃으며 답하고 있었다. 그 남성이 나가자 행원은 다른 손님에게 '무서웠다'라고 말한다.
이 일이 누군가에겐 별 거 아닌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결국 어떤 물리적인 폭력이 일어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며칠 사이에 일어난 두 번의 여성 공무원 폭행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 일은 우연히 피해자가 여성이었던 사건일까? 그저 운이 없어 일어난 폭력에 불과할까?
나에게는 중년 여성의 통화가 아무 신경도 안 쓰일 만큼 작았지만, 누군가에게는 불쾌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말했다. '여자들이' 문제라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그곳의 여성들은 최대한 그의 심기를 안 건드리고자 노력했다. 그는 아무 거리낌도 없이 통화하는 여성을 모욕할 수 있었지만, 다른 여성들은 그에게 아무런 불쾌함도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긴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 일을 겪는 5분을 기점으로 나는 여성으로 살아갈 날들이 막막해졌다. 여성 혐오는 더 이상 '내게는 일어나지 않는 불운한 일'이 아니다. 뉴스에서만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