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09. 구애인 추천 멘트
“자니?”
헤어진 연인에게 들을 수 있는 최악의 질문 중 하나. 역지사지 못하는 무례한 질문으로 손꼽히는 동시에 ‘네가 자든 말든, 제법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할 거다’는 일방적인 ‘선전포고’이기도 하다. 지난 여름, 첫사랑한테 <자니> 공격을 당했다.
2015년 2월. 겨울에도 따뜻하기로 유명한 대구에 제법 많은 눈이 내렸다. 한 정거장 가는데 3분 정도 걸리던 버스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제자리 걸음이었다. 언제 학교에 도착하려나, 창밖을 바라보다 깜빡 잠이 들었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뒤이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또래보다 낮아 울림이 크고 떠들석한 실내에서도 한 번에 귀를 사로잡던 바로 그 목소리. 내 오랜 첫사랑이었다. 문제는 버스의 습기와 열기는 반곱슬 머리를 부스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도수 높은 동글뱅이 안경 덕에 눈 크기는 반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재수를 앞둔 수험생이었다. 덕분에 우연히 만난 첫사랑이 다시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했다. 그때 ‘안녕’ 한 마디 못했던 게 많이 아쉬웠는지 대학생이 되어서도 눈 오는 날만 되면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런데 정확히 4년 뒤, 우연처럼 그 아이와 연락이 닿았다.
초등학생 때 같은 학급 아이들끼리 포털 사이트에서 온라인 카페를 만들어 소통하는 유행이 있었다. 진작 졸업은 했지만 한 번씩 들어가보곤 했다. 그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1년에 한 번 정도, 우리는 다른 시기에 각각 카페에 접속했다. 그러던 21년의 어느 오후, 우리는 동시에 카페에 접속을 했다. 쪽지로 바뀐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어린 날의 문자 대신 노란색 메신저로 서로의 하루를 공유했다. ‘사실 나 그때 너 좋아했는데’ 밤이 주는 무모한 용기로 결국 같은 시기, 우리는 학창시절 서로 좋아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라는 제법 어른스러운 덧붙임까지. 그렇게 마무리 된 줄 알았다. 그랬는데, 자정이 넘은 어느 날. 대뜸 ‘자니’로 시작해 이어졌던 장문의 메시지는 가히 가관이었다. 그 아이는 그날 이후로 다시 혼자 마음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아름다웠던 첫사랑이 끝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질문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해 던지는 말 아니던가. 자신의 마음을, 의견을,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무턱대고 오용하는 물음표는 상대를 할퀴는 갈고리가 되고 만다. 비단 내 첫사랑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최근 이뤄졌던 5호선 장애인 시위를 향해 질문을 던진 젊은 야당 대표의 물음이 그러했고, 일식집에서 밥을 먹는 지원 아동을 고발한 의문이 그러했다. 이런 물음은 공격에 불과하다. 문제는 공격으로 말미암아 점점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힘이 부족해진다는 것이다. 세대, 성별, 계급, 노사 등 많은 단어로 정의된 갈등은 사실 이해가 결여된 우리 사회의 여러 사례일 뿐이다. 그러니 차라리 자냐 묻지 말고, 왜 잠에 들지 못했는가 묻는 건 어떨까. 어쩌면 상대방을 조금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것에서부터, 갈라쳐진 사회는 봉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