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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Jul 13. 2020

Happy Birthday, 바람이 부네요

2020년 7월 11일

날씨

종잡을 수 없는 요즘 날씨.

아침을 먹을 때는 흐려 있더니 오후에는 해가 난다.

맑고 푸르며 덥던 하루. 조금 땀을 흘려 좋았던 하루



#1

14:48

옛 동네 친구 생일에 간다. 기차를 탄다. 마스크를 쓰라는 차내 방송이 나온다. 이미 기차에 오를 때 마스크를 쓴 채다. ‘만나자’ 말하는 게 조심스런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조심해서 만난다. 이것도 적응일까? 기차가 출발하고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는다. 그가 책에 인용한 슬라보예의 지첵의 인상적인 문장 하나를 옮겨 적는다.

‘즉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는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대하는지 사랑 없이 대하는지가 즉각적으로 명백해진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세상의 모든 단어가 다르게 쓰이곤 한다. ‘밉다’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 되고 반대로 ‘사랑한다’는 말이 텅 비어있기도 하다는 걸 사랑하는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명백하게 안다. 다만 그걸 스스로 부정하려 할 뿐이겠지.  



#2

17:50

삼청동에 간다 ㅍㅅ부탁으로 ‘산 로렌조’라는 이름의 디퓨저 리필액을 산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지난다. 미술관 앞 비슬나무 삼형제는 여전히 건재하다. 무료 관람일인 토요일, 국립현대미술관을 찾는 게 한동안 내 삶의 즐거움이었다.

미술관 주차장 횡단보도를 건널 때 ‘활명’이란 두 글자가 보인다. 활명수는 123년된 소화제다. 조선시대 궁중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씨가 동화약품을 창업하며 만들었다. 이제 활명은 동화약품의 소화 의약품 브랜드만은 아니다. 활명 플래그십스토어는 스킨케어을 다룬다. 내부는 부채와 우물을 콘셉트 삼았다.

      

경복궁을 가로지른다. 오랜만에 근정문 앞을 지난다. 행각 사진을 몇 장 찍는다. 버스를 타기 전 서촌 브릭웰에 들린다. 트위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던 건물이다. 얼마 전 완공했다. 서촌의 백송 옆이다. 골목과 골목 사이 벽돌우물(brick well)을 모티브로 한 중정을 조성했다. 이곳이 공공의 작은 공원 역할을 한다. 좁은 골목 안에 쉼표를 잇는 것 같다. 욕심을 내려놓고 공간ㅇ을 내어놓은 마음을 생각한다. 마음에 쉼 자리가 있는 사람이 쉼 자리를 만들 생각을 하는 것일 테지.



#3

22:16

생일 케잌을 사서 친구 집에 간다. 생일을 맞은 친구가 직접 요리해 내는 음식들을 차례로 맛본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는다.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 나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대해서, 먹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쉼과는 다른 숨표에 대해서. 우리는 떨어져 있는 동안 각자가 살아낸 삶의 호흡을 느낀다.

나는 모처럼 마음을 꺼내어 놓고, 꺼내어 놓는 내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친구가 친구일 때 마음을 꺼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일 테지. 그게 조금 모자라고 불규칙한 내 마음일지라도.

친구가 유튜브로 음악을 튼다. 이소라다. 상처 난 마음을 다독이는 이소라의 노래들. 그녀의 목소리는 마냥 둥글거나 부드럽지만은 않아서, 때로는 세차게 성난 음성이어서,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어서, 외로운 동굴이이서 잠든 슬픔을 깨운다.

오늘 우리가 하나로 박수친 노래는 ‘바람이 부네요’다. 그리고 그 노래가 이소라, 박효신 이전에 박성연이라는 재즈 가수의 노래라는 걸 안다. 박성연 씨가 휠체어에 앉아 ‘바람이 부네요’를 부르는 영상을 보며 듣는다. 그녀가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라고 노래할 때 나는 '세상엔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모두' 중 하나가 된다. ‘처음 태어난 이 별에서 사는 우리 손잡아요’라고 할 때 친구들과 내가 마음의 손을 잡았다 믿는다.   

 


#4

23:19

10시 30분에 친구 집을 나선다. 40분 정도 버스와 지하철을 탄 후 기차에 오른다. 마스크를 쓰라는 차내 방송이 다시 나온다. 이번에도 기차에 오르기 전부터 마스크를 쓴 채다.

차창 밖으로 연인이 보인다. 서로의 마스크를 내리고 가볍게 입을 맞춘다. 여자가 기차에 오른다. 남자는 기차 밖에서 기다린다. 여자가 자리를 찾는 동안 남자는 기차 밖에서 같이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이 기차 창을 사이에 두고 기차 안과 밖에 자리한다. 나는 기차 밖의 남자를 본다. 두 손을 가슴에 가져가 하트 모양을 만든다. 두 손을 머리 위로 가져가 하트 모양을 만든다. 나는 다시 ‘산다는 건 신비한 축복, 분명한 이유가 있어'라는 노랫말을 떠올린다. 그 이유가 없어도 ’세상엔 필요 없는 사람은 없어 모두’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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