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현관에서 우산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핸드폰을 탁 내려놓았습니다.
그냥 한 번 젖어보자.
마음이 먼저 뛰더군요. 산에 오르기로 작정한 날이었고 이미 옷은 운동모드, 가방은 준비 완료. 그런데 하늘이 쏟아붓는 소리에 보통 때 같으면 핑계를 대며 쉬었을 겁니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오히려 비가 반갑더라고요. 젖는 게 뭐 그리 대수냐는 심정으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묘하게도 5분쯤 지나 비가 잦아들었고 얼마 뒤엔 그쳐버렸습니다. 우습게도 그 순간 살짝 섭섭했습니다. 비를 피해 달리던 평소와 달리 일부러 맞을 준비를 하고 나니 고통이 아니라 경험이 되더군요. 피곤함이 기대감으로 바뀌는 이 기묘한 전환이 나중에 생각해 보니 꽤 오래 남았습니다.
한동안 600쪽이 넘는 ‘벽돌책’을 붙들고 살았거든요. 예전엔 얇은 책을 보면 금방 읽겠거니 했는데 어느 순간 400쪽짜리를 만나면 아쉽다,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페이지 수가 줄어든 게 아니라 내가 늘어난 거였죠. 비를 피하던, 내가 비를 기다렸던, 책의 분량을 두려워하던 내가 분량을 반기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이 줄어든 게 아니라 고통을 다루는 태도가 달라지니 무게가 달라졌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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