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나를 구할 수 있게 됐어

by 비행

​사랑은 나를 이루는 골자이자 내 생애 전체를 수식하는 낱말이야 이토록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풍족한 시간을 거듭해도 갈망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내가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 걸까

본 적 있지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에 대해서 그건 아주 심플한 동시에 첨예하며 내 지난날을 돌이켜 보게 했어 본인을 이상과 도태 두 가지로 이분해 두고 부족한 부분을 자르며 완벽에 가깝게 끼워 맞추는 거야 그리하여 종내 구현한 이상은 부푼 만족감을 선사하거든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을 만치 선명하고 현재가 프레임 단위로 잘게 쪼개져서 빛나는... 꼭 무력했던 자신에겐 이름도 주지 않고 그 애의 고생을 조금도 알아주지 않고 사실은 쫓겨난 그 애가 나인 걸 알면서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아

그 애는 울고 있어 아주 서럽게 울고 있어 그 긴 시간을 외롭고 어두운 극야를 외투 하나 없이 견뎠는데 이젠 그 이름으로 불리지도 못해 절망과 무력으로 점철된 현실이었어 그 애는 결국 살아 냈고 겨우 자기를 감쌀 줄 알게 됐어 오랜 갈증에 주어진 한 컵의 물로 견디는 방법을 배웠어 그건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니야 스스로 터득했어 생존 본능이었어 살기 위해서 그럼에도 희미한 숨을 한 줌씩 끌어모아 넘겨주기 위해서

그 애가 지은 집은 몸에 딱 맞아 그곳에 숨어 눈을 감고 꿈을 그렸어 막역하던 동경들이 손 아래에서 형체를 갖췄어 어떤 날엔 그 동경이 눈물 나게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 애는 초라하고 부정적인 상념으로 가득해 불안에 지나치게 떨며 타인에게 과도하게 치우쳐 또 다른 날은 고작 한 사람의 행동으로 종일 앓기도 해 눈짓과 말투로 세상을 판별하려 들고 그런 자신이 미워 죽겠다는 눈을 하고 있어 정말이지 손끝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동경들과는 거리가 멀잖아 상시 쾌활하며 눈매를 접어 웃고 사고가 명료하며 따라서 대범한 인물과는 같을 수 없잖아

그 애의 이상은 눈부신 사람이었어 작열하는 태양과 가장 가까이 있대도 결코 눈이 멀지 않는 사람

아늑한 집은 좋은 캔버스가 되어 주었어 그 애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 몇 번을 엎고 엎고 엎고 하늘이 낯을 몇 번이나 바꿀 동안 동경에 몰두했어 그리고 마침내 완성했지 가장 질 좋은 낱말들로만 빚어 만든 이상을

그 애는 곧 이상이 되었어 그간의 가뭄 같던 심정에 사랑이 폭우처럼 들이쳤지 아주 달고 긴 우기였고 과거는 헤아릴 생각조차 못 했어 그건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 집도 영영 묻어 버렸어 이렇게 하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할 테니까 실은 이상이 현격히 볼품없던 그 애를 지워 감추고 있단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문득 사소한 반항심이 고개를 치들고 참을 수 없이 외로워진 날에

그 애는 결국 이상과 양분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했어 녹이 슬어 이따금 몸에 맞지 않게 덜그덕댄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어 초기에는 보수에 능숙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게 된 거야 이상으로 사는 데에 익숙해졌거든 감춘 과거를 불러낼 수 없었어 집을 부수면서 그 애도 내쫓아 버렸거든 무저갱 같은 과거의 잔재로 영영 남겨 버렸거든 이상과 동화되면서 그 애의 이름을 빼앗고 시간을 없애고 기억의 뒤편으로 치워 버렸거든

그 벌을 지금 받는 걸까

나는 나를 잘 알아 자존심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런 내게 이상은 곧 자존심이며 삶의 이유잖아 따라서 어리고 외롭고 슬프던 그 애를 모른 척 그 계절에 여전히 남겨 둔 거고​

그러므로 결국 그 애를 꺼내 달랠 사람은 나밖에 없어

단순히 본인을 사랑하라는 허울 좋은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 고질병이자 숙원 지나치게 사랑을 갈망하는 나의 결핍을 꿰뚫고 품어 안아 줄 사람은 내가 유일하거든

그 애에게 다시금 나라는 이름을 쥐여 주고 싶어

지난 2년간 달래 주지 못해서 미안해 난 사소한 일에도 무너지는 너를 알아 지치고 외로운 날들을 자존심으로 덮으며 행복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지 과거를 마냥 거짓과 기만으로 덮어 두려고 해서 미안해 너도 그저 나일 뿐인데 왜 난 그걸 몰랐던 걸까

나만이 가진 섬세함과 다정함을 버리고 이상만을 좇으려고 노력했지 즐겁지 않아도 일관되게 밝았고 결국 속이 텅 빈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린 것 같았어

고질병이야 왜 모든 생명에게 사랑받길 갈구할까

하지만 내 품은 여전히 지나치게 넉넉하지 이젠 채울 방법을 알아 포장하지 않은 나를 사랑하는 거야 그 애도 나도 결국 같은 이름을 갖고 있잖아 내 인생의 주연은 단연 나야 몇 년 후에는 웃고 넘길 지치고 슬픈 가정사도 거듭되는 외로움도 별 일 아닌 것에 전전긍긍하는 어린 날도 주인공에게 주어질 시련일 뿐이야

이상도 결국 내가 빚어낸 나의 모습

그 모든 게 합쳐져 온전한 내가 된 거야

과거를 면밀히 들추고 다독여 줄 사람도 말하지 않은 기의까지 직시해 줄 사람도 양껏 사랑해 줄 사람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해 줄 사람도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인지 알아줄 사람도 나를 가장 응원하고 지지해 줄 사람도 결국 지금의 나 자신이야

오늘에야 비로소 나는 나를 구할 수 있게 됐어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것

그게 내 세상의 근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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