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솔-로그로뇨(23km)
엄청난 밤이었다. 아름다운 노을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지평선에서 뜬 추석 보름달.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재미있는 술자리. 맛있는 와인.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눈이 번쩍 떠졌고 휴대폰의 전원이 완전히 나간 걸 알게 되었다. 그대로 계속 잤더라면 알람을 전혀 볼 수 없었을 거라 차라리 자다 깨버린 게 잘 되었다. 휴대폰을 충전시키면서 씻고 정리하고 아침으로 빵 한 조각 먹고 출발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벗어나자마자 포도밭이 계속 보인다. 오르막, 그리고 내리막.
10시 50분쯤 비아나(Viana)에 도착했다. 버섯리조또 맛있는 집이 있다는 리뷰에 여기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막상 그 집에 가니 점심이라 그런가 그 메뉴는 안된다고 한다. 그 뒤로 알게 된 거지만 많은 바와 레스토랑들이 점심영업은 1시~3시 사이에, 저녁 식사는 8시 이후부터 본격 시작이라 주력 메뉴들은 그 전에는 없는 경우가 많고 점심경에는 주로 간단한 타파스(나바르 지역에선 ‘핀초’라고 부르는)만 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먹고 싶었던 버섯 리조또는 없고 대신 쇼케이스에 있는 핀초? 샌드위치? 가 전부이고 그나마도 속에 든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를 불쌍하게 여긴 주민분이 너무 친절하게도 스페인어로 설명해주신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쇼케이스에 적힌 샌드위치 내용물 설명도 진작 알지 않았을까요 선생님. 정성이 무색하게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서 추천해달라는 뜻의 영어와 바디랭귀지와 한국어를 사용해서 참치 계란 샌드위치와 햄 계란 샌드위치와 카페 콘 레체 하나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밥을 먹고 나오니 마음이 넉넉해져서 그런지 도시가 좀 더 잘 보인다. 오래된 중세 느낌의 골목골목 위엔 만국기 같은 깃발들이 많이 걸려있었다. 마을 중심부를 조금 지나자 현대적인 건물들이 나오고 시청 같은 건물에 걸린 큰 플래카드에 1219- 2019라고 적혀있는 게 보였다. 큰 축제가 있겠거니 짐작은 했는데 이 작은 도시가 800년이나 된 기념이라니..!! 서울보다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란 생각에 왠지 밟고 있는 오래된 보도블록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을을 빠져나와 계속 가려는데 내리막길 아래로 멀리 보이는 평원의 까미노는 딱 봐도 한참 동안 그늘이라곤 1도 없는 길이다. 선크림 바르고 선글라스 장착하고 뙤약볕을 걸으며 멘탈 유지를 위해 무언가 붙잡을게 필요하다는 생각에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 와중에 물도 부지런히 마시고 지천에 깔려있는 포도밭에서 포도도 조금 따먹었다.
포도밭 사이사이로 난 길엔 과실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도 없다. 수백 년간 많은 순례자가 지나갔던 길, 포도밭의 주인들은 순례자들이 길 가까운 곳에 있는 포도(물론 소량)를 따먹는 것에 크게 인색하지 않다고 한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욕심껏 가득 따지 않고(어차피 많이 따 봐야 들고 걸어가야 하는 입장에선 짐일 뿐이다) 목을 살짝 축일만큼, 주먹만큼만 따서 스무 알 남짓 되는 포도알을 하나씩 먹으며 한참을 걸어 로그로뇨에 드디어 도착했다.
리오하는 와인의 나라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와인 생산지라고 한다. 그래서 리오하의 주도, 로그로뇨에선 포도를 수확하는 9월 중순에 큰 와인 축제가 열리고 맛있는 타파스 바가 몰려있는 타파스 거리엔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넘쳐난다고 한다. 까미노를 걷기 전에 이 정보를 듣고서 와인의 도시까지 가서 와인을 제대로 즐기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어(?) 한국에서부터 간을 단련시키기 위해 거의 하루에 한 병 꼴로 와인을 마셔가며 훈련(?)을 했다. 그리고 그 훈련의 효과는 몹시 훌륭해서, 나는 밤늦도록 로그로뇨의 타파스와 와인을 즐길 수 있었다.
타파스 (Tapas)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는 스페인의 음식 문화중 하나. 컵받침 정도의 작은 접시에 나오는 한 입거리 정도 되는 음식들의 총칭이다. 주로 빵 위에 고기나 해산물 혹은 과일 등을 올려 와인이나 맥주와 함께 곁들여 먹는 듯.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한 잔의 와인을 시켜서 천천히 와인을 먹는 동안 와인에 먼지 앉지 않게 덮어 두던 작은 접시 위에, 가게 주인이 서비스로 작은 음식 한 조각들을 주면서 시작되었다는 이야기가 유력하다고 한다. 이렇게 양이 적은 음식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 접시만 먹어서는 양이 차지 않고, 가게의 다른 타파스들을 이것저것 시켜가며 먹거나, 타파스 거리인 경우 바Bar들을 순회하면서 아이쇼핑하듯 먹고 이동하고 먹고 이동하고 먹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섭취 시간이 짧고 이동이 잦기 때문에 착석하는 경우보단 바에 팔을 기대고 서서 먹게 되고, 따라서 이런 타파스 바에는 (레스토랑용으로 준비된 좌석 빼곤) 의자가 거의 없다.
-본인 작성
로그로뇨에선 달랑 하루 묶었는데 이 밤에만 약 5개 정도의 가게를 간 것 같다. 특히 이곳의 타파스 거리에선 양송이 타파스가 유명해서 그것만 각각 다른 가게에서 두 번이나 먹었다. 거기에다 새콤하고 떫은맛이 거의 없고 자연스러운 단맛이 나는 리오하 와인은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내가 지나가고 약 열흘 뒤에 로그로뇨 와인 축제가 시작된다는데 그때 다시 돌아와서 머물렀다 갈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무거운 게 싫어서 샴푸 비누도 고체형태로 최소한만을 챙겨 온 내가 이곳의 마트에서 싸게 산 작은 리오하 와인 한 병을 가방에 넣고도 일주일을 넘게 걸을 만큼, 나는 그렇게 리오하 와인과 사랑에 빠졌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